▲ 고양자유학교 교문.
살구
그렇게 대안학교인 고양자유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곳에는 학생을 옭아매는 규칙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알 수 없는 규칙과 무언의 약속이 곳곳에 있었다. 공놀이를 해도 되는지, 회의를 다수결로 정해도 되는지, 신발장 구역을 나눌지 말지, 아주 작은 문제까지도 모두가 회의하고 토론하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약속들은 보이지 않는 규칙이 되어 학교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선배 교사도 아이들도 저마다 규칙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 어떤 규칙도 물건도 자리도 사연 없이 남아있는 건 없었다.
이야기꾼은 선배 교사만이 아니었다. 아이들도 저마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들살이(자립을 목표로 학교 밖에서 진행하는 여행 수업) 때 가방을 뭘 챙기면 좋을지, 급식 먹고 설거지 줄은 어디서부터 서는지 미주알고주알 일러주었다. 반에 생일인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가 원하는 음식으로 생일 요리를 만든다는 것도, 그 요리를 옆 교실에 나눠준다는 것도 아이들 덕분에 알았다. 학교에 온 첫 해는 그렇게 모르는 것 투성이로 그저 하루하루 새로 배우고 뒤늦게 깨닫는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잔소리가 하고 싶은 걸 어떡해
학교에 대해 새로 알게 되는 것보다 원래 알던 게 더 많아질 즈음, 나는 잔소리 많은 교사가 되어 있었다.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다 보니 스스로가 만화 속 악당처럼 느껴졌다. 규칙과 강요가 싫어서 학교를 늘 빼먹었던 내가, 숨통 트이는 학교를 찾겠다던 내가, 이렇게 잔소리가 많아지다니.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교사가 되기엔 스스로가 마땅찮았고, 매번 지적하는 잔소리쟁이가 되기엔 스스로 너무 찔렸다.
그 간극에 고민하던 시기, 우연히 학창시절 은사님을 찾아뵈었다. 교사가 된 제자를 신기해하시면서도 잘 어울린다고 해주셨다. 그러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나 사실 너 때문에 교사관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엔 의견을 똑부러지게 말하는 널 보면서 '얘가 날 이겨먹으려고 하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내가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못 봤구나' 후회가 남더라."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학창시절 그토록 치열했던 이유는 내가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걸.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을 재단하고 억압하는 관습이 싫었고,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면 그 자체로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았다.
추운 겨울, 교사들은 두꺼운 패딩을 입으면서 학생들에게는 교복 겉옷 위에 다른 옷을 껴입지 말라던 규칙에 분노했던 날이 있다. '야간자율학습'이라면서 모두가 다 참여해야 한다며, 안 하는 사람 때문에 면학 분위기 망치게 하지 말라고 연설하던 교감선생님의 말이 미치도록 거슬리던 날도 있었다. 자율학습 신청서에 불참으로 적어 내면서 왜 자율인데 내가 선택하지 못하냐며 교무실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돈 내서 산 교과서인데 정작 수업은 EBS교재로 하는 영어선생님께 이유를 물었다가, 수능만이 공교육의 목적이냐고 당돌하게 반문했던 날도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늘 정당했고 용기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양자유학교는 이기는 곳이 아니었다. 왜 이런 규칙이 생겼는지 물으면 늘 답이 돌아왔다. 아이들이 "왜 그래야 해요?" 물으면 나는 항상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 이유가 매번 정답은 아니다. 다만 아이들은 물을 수 있고 교사는 답할 수 있다. 동시에 교사도 물을 수 있고 아이들이 답해줄 수 있다. 그것이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학교와 가장 큰 차이였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이기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저 말하면 된다.
변화를 증명하는 아이들
싹터(초등), 꿈터(중등), 숲터(고등)까지 12년의 흐름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큰 아이들은 작은 아이들에게 '라떼는~' 이야기를 하며 지금은 사라진 수업이나 활동의 무용담을 들려주곤 한다. 꿈터에서 처음 방송반을 만들던 아이들은 교실마다 스피커를 달고 장비를 구입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희들도 하고 싶은 거 뭐든 할 수 있다고 후배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책방이 너무 지저분하다며 자발적으로 도서부를 만든 아이들도 있었다. 석 달을 열심히 쓸고 닦으며 책방을 정리하더니, 끝내는 헌책을 내다 팔고 공동체 모금을 통해 돈을 벌어 희망도서를 직접 구입하고는 소임을 다했다며 해체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꿈터에는 다시 새로운 구성원으로 도서부가 활동 중이다. 3년 전 꿈터 아이들이 대안학교 청소년 축제에서 다른 학교 밴드부의 무대에 매료돼 그 해 겨울부터 밴드를 만들었다. 시작은 그저 악기를 배우는 정도였는데 실력은 금세 늘었고, 학교 행사마다 무대에 올랐다.
처음엔 학교에서 일렉기타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자연의 소리를 지향하는 교육과정과 귀가 예민한 초등 동생들을 고려해, 꿈터·숲터끼리의 공연에서는 괜찮지만 전 학년이 모이는 공연에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락의 열정에 사로잡힌 밴드보이들은 당연히 항의했다. 몇 차례 교사 회의와 아이들과의 면담이 오갔다. 우선 코앞에 닥친 공연은 원래 규칙대로 하고 이후 변화를 모색하기로 했는데, 며칠 후 아이들은 몰래 일렉기타와 이펙터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학교에 도파민을 가득 채운 뜨거운 무대로 그날 행사는 끝이 났다.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기고만장하게 바라보며 무대를 내려오던 아이들의 모습은 얄밉긴 했으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직접 변화의 필요성을 화려하게 증명한 것이다. 이후 밴드공연을 제한하던 규칙은 사라졌다. 낡은 규칙이 바뀌고 새로운 약속과 문화가 들어왔다.

▲ 2024년 꿈터 캠프 때, 아이들이 직접 학교에 바라는 점을 적고 간담회를 진행했다.
김솔
아이도 교사도 부모도, 우리 모두 자라고 있다
교사도 부모도 아이들도 각자의 속도로 졸업하고 학교를 떠나면, 또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주제가 학교를 채운다. 밀물과 썰물처럼 새로운 약속이 들어오고 옛것이 쓸려나간다. 학교에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처음 학교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질문이 많아지고, 낯선 문화가 엉성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몇 년 지나면 자연스레 규칙을 만드는 한 사람이 된다. 어떤 일에는 누구보다 더 깐깐한 '고인물'처럼 굴다가도 또 어떨 때는 변화를 주도하는 혁명가가 되기도 한다. 나 또한 그렇다.
부모, 교사, 아이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모습은 굉장히 무질서해 보이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표지판과 횡단보도가 있는 것만 같다. 무질서 속의 질서화. 어쩌면 그 모순이 이 학교의 정체성이지 않을까 싶다. 생각하고 결정하고 협의하는 과정은 평화롭지만은 않다. 각자 자기주장을 말하며 부딪히다 보면 치열해진다. 그렇지만 이겨먹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이기는 게 없다. 그저 같이 살아갈 뿐이다.
학창시절에는 이글거리는 투지를 눈에 담고 학교를 다녔는데, 지금은 내가 못 보는 것이 있을까 봐 놓치지 않으려고 매의 눈으로 학교를 다닌다. 그 시절 나와 달리 우리 아이들은 교사의 말을 잘 따르는 순한맛이다. 언제라도 불만을 이야기하고 이유를 물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이곳에서 굳이 곤두설 필요가 없다. 어릴 때 그토록 바라던 숨통 트이는 학교란, 곧 눈치 보지 않고 숨 쉴 수 있는 학교였다. 아이라면 질문하고 혼나고 떼쓰고 좌절하고 다시 뛰놀 수 있어야 한다. 아이가 아이다울 때 눈치 보지 않고 안전하게 구르고 일어설 수 있는 곳, 아이의 숨과 목소리가 온전하게 지켜지는 곳. 그런 학교를 찾고 싶었다.
그런 절절한 기대를 안고 고양자유학교 교사가 되었다. 여기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성껏 써낸 서술형 답안쯤은 되는 것 같다. 이곳에서 교사로 지내며 종종 안전하다고 느낀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느낄 수 있기를, 학교에 머무르는 매 순간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잔소리를 하겠지. 그리고 아이들은 늘 "왜요?" 하고 묻겠지. 그 되물음 덕분에 학교는 어제보다 오늘 더 안전하고 따뜻하게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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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가르치며 글도 쓰고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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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기 싫어병'으로 매일 조퇴하던 내가 선생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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