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순희님의 삶을 엮은 책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은빛출판사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를 읽고 처음 드는 생각, 두껍지도 않은 이 한 권의 책에 인문학을 이렇게 오롯이 담을 수 있을까? 역사에서 정의가 외면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삶의 방향을 되찾아 주는 철학이 문학 작품을 읽는 감동이 이 한 권의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책임을 묻지 않는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
우리 옛말에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아닌 것 같다. 때린 놈이 역사 평가 운운한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이날을 비판적으로 기리기 위해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양심 살아있어야 할 최고의 사법부, 대법원 재판관 13명 중, 단 한 명의 재판관을 제외하고 모두 사법살인에 동참하였다. 당시 재판장이었던 민복기는 1978년 정년 퇴임하면서 '내 재임 시의 공과는 후세의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혁당 사건은 2007년 1월 23일 재심청구에서 무죄로 판결이 났다. 역사가 심판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하수인의 대가로 온갖 명예와 부를 누리면 살아 놓고, 하수인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되나? 우리 역사는 그 심판을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되풀이되는 것은 아닌가? 강순희님도 이러한 현실에 아직도 분노하고 있다.
피해자들 보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해자 혼쭐내는 것도 꼭 해야 한다는 거예요. --- 아니, 왜 피해자는 계속 당하고 가해자는 처벌 안 받아요? 우리 사회는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도둑놈도 도둑질한 것만 빼면 착하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도둑놈도 효자이고, 의리가 있을 수 있지만, '도둑질'하였다는 근본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도둑놈은 어떤 이유에서든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과 '자유'이다. 권력으로 '생명'을 빼앗고, '자유'를 억압하고 이룬 성취는 진정한 성취가 될 수 없다. 강순희님은 이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름 없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정치 제물로 삼는다면 그 제물 위에 피는 꽃은 무슨 꽃이 피더라도 향기 없는 꽃이요, 빛깔 없는 꽃이요, 생명력이 없는 꽃일 겁니다.
인생은 진인사대천명
내가 철학책을 읽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삶의 방향을 찾고, 그래서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찾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내가 책을 읽고 삶의 방향을 세운 것은 '진인사대천명'이다.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먼저 신을 찾아 소원을 비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다하고 난 뒤에 결과를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
강순희님을 삶을 읽고 나니, 나는 '진인사대천명'을 마음속으로만 새기고 살아왔던 것 같다. 강순희님의 삶 하루하루가 진인사대천명이었다.
자기한테 주어진, 자기 앞에 펼쳐진 운명을 열심히 살아가는 거, 그게 인생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서 극복하며 사는 것,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장애물이 닥쳐도, 원망 같은 거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그런 게 쌓여 인생이 된다.
강순희님은 정말 그렇게 살았다. 조작된 인혁당 사건으로 남편이 1, 2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을 때인데도 그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다. 성인의 경지다.
안정과 평안이 보장된 내일을 고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오늘을 불만 없이 누리며 살아갑시다.

▲ 동아일보 광고에 강순희님이 남편 우홍선님에게 보낸 편지(동아일보 1975.2.8.)
정호갑
정보부에서 나를 또 데려가더라고요. 그때 아들 데리고 기차 이등칸 타고 조사받으러 가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 '야! 이게 인생의 무슨 맛이냐? 매운맛이다. 나중에 먹으면 맛있다 할지 몰라도 지금은 힘들구나.'
남편의 구명을 위해 온갖 고초를 다 겪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으나 끝내 허사가 되었다. 그런데도 먼 훗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는 동안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해요. 불행하지 않았어요. 행복하게 만났고, 행복하게 살았고, 행복하게 애들 키웠고, 일도 닥치는 대로 행복하게 했고, 남편 때문에 싸울 때도 있는 힘을 다했어요.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거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강순희님에게서 이런 거인의 모습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여린 여인의 삶에 대한 눈물
책을 읽는 내내 '참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생각하다 보니 공감을 넘어선 감탄과 경외의 연속이었다. 담담하게 때로는 울분을 삭이면서 강순희라는 위대한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니 마냥 우러러만 볼 뿐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 우구씨가 쓴 에필로그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먼 곳을 바라보며 읽기를 잠시 멈춰야 했다.
저녁 약속이 없어 일찍 귀가한 어느 날 초고가 눈에 들어왔고, 침대에 걸터앉아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머님께 수십 번 들었던 이야기이고 또 일부는 직접 겪은 이야기인데, 어느 지점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흘렀고 급기야는 어머니를 부르면서 오열했다.
아들이 흘린 눈물은 폭압에 굴하지 않고 저항했던 위대한 투사 강순희의 삶이 아니라, 한 여인으로 아내와 어머니의 삶에 대한 눈물은 아니었을까? 남편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의 험악한 세상과 부대끼면 겪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와 외로움, 이를 잘 이겨내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얽히고설켜 오열로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 나의 눈물은 그랬다.
믿고 의지하며 사랑했던 남편을 국가의 폭력으로 하루아침에 잃었는데, 곁에서 하는 위로의 말이 제대로 들리겠는가? 아무리 진심을 담은 말일지라도. 강순희님은 남편을 잃은 여린 아내로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이 도와주신다. 온 세상이 다 애통해한다. 원통하다 분하다. 힘을 내라. 얘들을 보라. 영광되게 생각하여라. 모두모두 공허하게 내 가슴을 울릴 뿐 나의 꿈 나의 희망은 아니로다.
남편을 하루아침에 잃고 의지할 곳 없는 한 여린 아내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어쩌면 저 푸른 / 당신의 푸른 넋이 머무를 것 같은 / 저 푸른 하늘에 나 이제 / 나 외롭다고 응석 부리고 싶다.
'나 외롭다고 응석 부리고 싶다'에서 그만 울컥한다. 그 힘듦을 감추고 가슴 속에 꾹꾹 눌러오면서 살아온 그 삶은 어떠했을까? 얼마나 힘든 삶이었을까?
사랑의 힘
이런 강순희님의 강인한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어 가다 보면 '나는 아버지 사랑을 진짜 많이 받았어요'라는 말이 거듭나온다.
생각해 보면 난 어렸을 때부터 사랑 참 많이 받았어. 부모 사랑도 많이 받았고, 남편 사랑도 많이 받았고, 직장 상사들한테도 사랑받았어. 내가 참 인덕이 많은 것 같아.
강순희님이 아픔을 이겨내는 힘은 바로 사랑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래서 책 제목도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가 아닐까?
이제 나도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생을 살고 싶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 김세라 (지은이),
은빛,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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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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