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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오르다가 꺼낸 '초경량 세트', 피로가 녹습니다

1.5g의 찻잎, 작고 가벼운 보온병, 그리고 초소형 개완과 찻잔 하나... 나만의 티타임 도구들

등록 2026.07.18 19:21수정 2026.07.1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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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편집자말]
 마치 양산을 똘똘 만 것 같은 폈다 진 무궁화, 초록 기운이 남아 송진 향기가 폴폴 나는 솔방울, 익지 않은 상수리, 떡갈나무 잎사귀를 티타임에 초청해보았다.
마치 양산을 똘똘 만 것 같은 폈다 진 무궁화, 초록 기운이 남아 송진 향기가 폴폴 나는 솔방울, 익지 않은 상수리, 떡갈나무 잎사귀를 티타임에 초청해보았다. 노시은

요즘 매일 산에 갑니다. 전문 산악인이나 등산 애호가들에게 제가 매일 오르는 북한산 자락은 그저 가벼운 산책 코스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아직 덜 깬 무거운 몸을 이끌고 헐떡이며 산을 오르는 제 마음만은, 흡사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하는 산악인의 마음입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조선 시대 선비들이 험준하고 가파른 '단발령(斷髮嶺)'을 넘을 때의 비장함과 맞먹는다고나 할까요.

단발령.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은 이 고개는 강원도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한 험지입니다. 고개를 넘는 사람마다 눈앞에 촤라락 펼쳐진 금강산의 황홀한 진면목을 바라보게 되면, 누구라도 당장 머리를 깎고(斷髮) 중이 되어 이 아름다운 산속으로, 저 아득한 선계(仙界)로 떠나고 싶어 진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죠. 이 극적인 감동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해 낸 이가 있으니, 바로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입니다.


겸재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산도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신묘년 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신묘년 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노시은 촬영

겸재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 가운데 <단발령망금강산도(斷髮嶺望金剛山圖)>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이 화첩은 1711년 신묘년, 서른여섯 살의 정선이 백석 신태동과 함께 처음으로 금강산을 유람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초기작입니다.

정선은 여행길에서 당시 김화현감이었던 평생의 벗 사천 이병연 일행과도 만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산천을 직접 마주하고 그 생생한 인상을 화폭에 옮긴 이 작품에는, 후일 겸재식 진경산수화로 무르익을 독자적인 구도와 화법의 초기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림의 구도는 파격적일 만큼 극적인 대비를 이룹니다. 화면 오른쪽 아래, 정선 일행이 서 있는 단발령은 쌀알 모양의 먹점을 촘촘히 겹쳐 찍는 미점준(米點皴)으로 어둡고 묵직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면 넓은 운무의 여백 너머로 신기루처럼 솟아오른 금강산 일만이천봉은 날카롭게 내리긋는 수직의 필선과 밝게 처리된 암봉으로 눈부시게 빛납니다. 어둡고 무거운 세속의 문턱인 단발령과 밝고 신비로운 금강산의 대비는 마치 현실에서 이상향을 처음 마주한 순간처럼 읽힙니다.

1711년, 서른여섯 살의 정선이 처음 금강산과 대면했을 때 느꼈을 경이로움이 붓끝을 타고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고개 중턱에는 험한 산길을 오르느라 타고 온 가마에서 내려, 넋을 잃고 금강산의 장관을 바라보는 정선과 백석공 일행이 점경인물로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저 역시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북한산을 오르다, 마침내 시야가 탁 트이며 웅장한 바위산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전망대 데크에 다다를 때면 단발령에 선 옛 선비들의 마음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산 아래 빌딩 숲에서 묻혀온 속세의 얄팍한 근심들이, 저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한낱 먼지처럼 가벼워지니까요. 그리고 이 완벽한 진경(眞景) 앞에서 땀을 식히노라면, 어김없이 간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맑게 우려낸 향긋한 차 한 잔입니다.

매일의 티타임을 위해 현실과 타협한 결과


하지만 여기서 그림 속 양반들과 저의 처지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정선의 그림을 조금 더 세밀하게 뜯어볼까요? 시선을 산 능선 아래 꼬불꼬불한 길로 내려보면, 경치에 취한 양반들 뒤편으로 무거운 짐을 잔뜩 싣고 고개를 숙인 노새와 봇짐을 짊어지고 헉헉대는 동자와 짐꾼들의 모습이 숨은그림찾기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일부, 《신묘년 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일부, 《신묘년 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노시은 촬영

그렇습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저 깊고 험한 산속에서 유유자적 맑은 차나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그 무거운 화로와 참숯, 먹을거리, 묵직한 도자기 찻사발, 끓일 물 등을 대신 짊어지고 산을 오른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짐을 대신 져 줄 노새나 하인이 없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신윤복의 그림 속 여인들처럼 자연 속에서 제대로 된 야외 찻자리를 폼나게 펼쳐보겠다는 낭만에 취해 있었습니다. 푸른 산에 어울리는 우아한 청자 다구 세트,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묵직한 대형 보온병, 찻잔을 올릴 미니 테이블에 촬영 장비까지 배낭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산을 올랐죠(관련기사: 에어컨 리모컨 대신 한 모금, 온몸이 서늘해지는 방법 https://omn.kr/2iqwg).

결과는 어땠을까요? 분명 머릿속엔 맑고 우아하게 산바람을 맞는 제 모습이 그려져 있었건만, 현실은 징글징글하게 무거운 배낭에 짓눌려 헐떡이는 한 마리 불쌍한 노새, 혹은 단발령의 이름 모를 짐꾼이 바로 저였습니다. 뷰가 조금 아쉽다 싶어 무거운 짐을 풀었다가 '아무래도 여기가 아닌가 봐' 하며 다시 짊어지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이러다간 어깨와 허리가 먼저 나가떨어질 판이었습니다. 낭만은 짧았고, 현실의 배낭은 돌덩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산에 오르기로 결심한 지금, 저는 살기 위해, 그리고 매일의 티타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철저히 현실과 타협했습니다. 짐꾼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초경량 티타임 세트'를 구비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초경량 세트를 시도해본 날. 계곡 근처에서 자리 잡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이것은 될 세팅이라며 기뻐했다.
처음으로 초경량 세트를 시도해본 날. 계곡 근처에서 자리 잡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이것은 될 세팅이라며 기뻐했다. 노시은

딱 서너 번 우려 마실 1.5g의 찻잎, 200ml의 뜨거운 물이 담길 작고 가벼운 보온병, 그리고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초소형 개완(蓋碗)과 찻잔 하나. 운동용 조끼 뒷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이 단출한 구성이 요즘 제 매일 산행의 든든한 동반자입니다. 화려한 다기 세트라는 허례허식을 과감히 덜어내고, 오직 '차를 우려 마신다'는 본질만 남긴 셈이죠.

눅눅했던 불쾌감과 근육의 피로가 사르르

전망대 데크에 도착해 헐떡이던 숨이 잦아들 무렵, 조끼를 벗어던지고 풍광이 가장 근사해 보이는 자리를 잡습니다. 요즘처럼 짙은 녹음이 우거진 산행에서 제가 이 초소형 개완에 주로 담았던 것은 화려한 향기를 자랑하는 우롱차와 백차들이었습니다. 철관음(鐵觀音), 봉황단총(鳳凰單叢), 동방미인(東方美人), 그리고 은빛 솜털이 덮인 운남대백호(雲南大白毫)가 그 주인공들이죠.

작은 개완에 1.5g의 찻잎을 톡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붓습니다. 이 차들을 선택한 이유는 산이 뿜어내는 공기와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물을 머금은 철관음의 난초 향, 봉황단총의 아찔한 과일 향, 동방미인의 꿀처럼 달콤한 향기가 서늘한 산바람을 타고 훅 피어오릅니다. 숲의 짙은 피톤치드 냄새 위로 맑은 차탕의 꽃향기가 한 겹 덧입혀지는 순간, 작디작은 찻잔에 담긴 온기를 호로록 들이마시면 눅눅했던 불쾌감과 근육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립니다.

 동방미인 같은 향기 좋은 우롱차는 산에서 마시면 피톤치드 향과 어우러져 정말 황홀한 맛과 향기를 제공한다.
동방미인 같은 향기 좋은 우롱차는 산에서 마시면 피톤치드 향과 어우러져 정말 황홀한 맛과 향기를 제공한다. 노시은

화려한 다실도 없고 격식을 갖춘 찻상도 없지만, 아쉬움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거대한 북한산 전체가 저만의 프라이빗한 다실이 되어주니까요. 수백 년 전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며 속세를 잊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벅찬 마음이, 1.5g의 찻잎이 우러난 이 작은 찻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여름의 한가운데서 향긋한 우롱차와 백차로 숲의 향기를 즐기는 요즘인데, 제 마음은 벌써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과 겨울에는 이 작고 앙증맞은 개완에 조금 더 묵직한 차들을 담아볼 생각에 설렙니다.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숙보이차나, 바위의 서늘한 기운을 품은 무이암차(武夷巖茶), 혹은 낙엽을 닮은 달콤한 홍차를 챙겨 오르면 또 어떤 위안을 얻게 될지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거리네요.

거창한 도구는 필요 없습니다. 마음을 짓누르는 욕심을 덜어내고,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가벼운 무게의 위안만을 챙겨 드는 것. 오늘 아침에도 저는 이 초경량 티타임 세트를 챙겨 기꺼운 마음으로 나만의 단발령을 넘습니다. 혀끝을 기분 좋게 깨우는 차 한 잔의 다정한 온기가, 산속 어딘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티타임 #북한산 #노시은작가 #스누피홀릭 #우롱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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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낭 속의 영국 남자』, 『언제라도 티타임』, 『화요일의 티타임』의 저자. 세상 구경하고 차 마시며 글, 사진, 영상, 그림으로 삶을 기록합니다. 아직은 벌이가 시원찮은 유튜버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는 진심입니다. 좋은 기획과 재미있는 작업 제안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 비즈니스(출간·강의·글작업) 문의: peanutshol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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