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호프> 출연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국내 정상급 배우들은 물론, 세계적인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의 가세는 한국 영화가 글로벌 마켓에서 당당히 어깨를 겨누는 메인스트림으로 우뚝 섰음을 증명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에이리언: 커버넌트> 의 차갑고 정교하지만 비정한 안드로이드 데이비드부터 <엑스맨> 시리즈를 관통하는 젊은 매그니토까지, 선과 악의 경계에서 SF 장르 고유의 장점을 완벽하게 연기해 온 패스벤더였기에 그의 합류는 작품의 예술적 스펙트럼을 단숨에 확장할 필살기로 보였다.
특히 그가 출연료 대신 최소한의 거마비만을 받고 흥행에 따른 러닝 개런티 계약을 흔쾌히 수락했다는 후일담은, 나홍진이라는 감독의 작품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대변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가 막을 내리고 엔딩 크레디트와 쿠키 영상까지 모두 끝난 순간, 개인적으로는 적잖은 허탈감을 느꼈다. 패스벤더는 끝내 컴퓨터그래픽(CG)으로 완전히 구현된 외계인의 모습으로만 스크린에 등장한다. 물론 미지의 존재가 주는 생경함과 기괴함을 극대화하려는 감독의 연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극의 핵심 서사를 이끄는 외계인이라는 존재의 중요성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관객들이 기대했던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의 연기적 존재감을 거의 지워버린 선택은 아쉬움을 넘어 허탈함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그 역할의 무게감이 남다르다 한들, "굳이 이럴 거라면 왜 그를 캐스팅했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배우 특유의 섬세한 연기와 스크린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모두 가린 채 목소리와 모션 캡처의 도구로만 활용할 생각이었다면, 대체 왜 마이클 패스벤더여야 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이 거창한 협업은 단순한 '이름값 낭비'로 전락한 듯 보였고, 이는 영화가 남긴 가장 큰 아쉬움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게 영화는 시작부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특히 초반 황소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태로 폐사하거나 신체 일부가 훼손된 채 발견되는 이른바 '가축 훼손' 장면은 해외에서 오래전부터 외계인이 표본 채취를 위해 벌인 일이라는 음모론의 단골 소재로 소비돼 왔다. 그런 익숙한 설정 때문인지 필자는 자연스럽게 영화 속 장면을 보며 최근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디스클로저 데이>를 떠올렸고, 외계인의 존재를 추적하고 폭로하는 한국형 SF가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러한 내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완전히 다른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영화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을 끈질기게 유지하며 관객을 끌고 간다. 초반 긴 시간 동안 괴물의 실체를 철저히 감춘 채, 소리와 흔적, 그리고 치열한 총격전만으로 특유의 서스펜스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그러나 공들여 축적한 영화 속 긴장감은, 막상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급격히 힘을 잃고 만다.
개인적으로는 CG의 완성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베일을 벗은 괴물의 기괴한 비주얼이 꼭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을 떠올리게 해 몰입을 방해했다. 그간 쌓아 올린 공포의 밀도가 시각적 설득력 부족으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탓인지, 실제 객석 곳곳에서는 탄식 대신 허탈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느껴진 조인성

▲ 영화 <호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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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간접광고(PPL)와 현실감이 부족한 공간 연출도 몰입을 방해했다.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분명 1980년대 한국인 듯 보이지만, 조인성이 연기한 인물은 마치 서부극의 고독한 총잡이를 연상시키는 이국적이고 이질적인 아우라를 풍긴다. 여기에 초반 조인성 일당이 타고 달리는 빨간색 외산 픽업트럭 한 대만이 강렬한 인상을 남길 뿐, 이후에는 협찬 브랜드 차량들만 반복적으로 화면을 채운다.
게다가 한낮의 도로 위에는 다른 차량이나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를 보며 극의 상황에 깊이 빠져들기보다 '이 도로를 모두 통제하고 촬영했나 보다'라는 제작 현장의 풍경이 먼저 떠올랐다. <추격자>와 <황해>에서 흙먼지와 날것 그대로의 공간, 숨 막히는 사실감을 보여줬던 나홍진 감독이 왜 이런 사소한 틈을 놓쳤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물론 사방을 통제하고 등장인물들을 외계인과 함께 하나의 우리에 가둔 듯 완전히 고립시킴으로써 디스토피아적 황량함과 극한의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려는 감독의 의도는 충분히 읽힌다. 그러나 배경은 분명 농촌인데도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 한 사람 보이지 않고, 차량조차 오가지 않는 텅 빈 도로에서 이어지는 추격신은 다소 현실감을 떨어뜨렸다. 마치 영화 <디 워>의 시가전처럼, 실제 공간이 아닌 철저히 통제된 세트 위에 마련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결국 영화는 조인성 배우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적극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마치 그를 나홍진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선언이라도 하듯 후반부는 조인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추격해 오는 외계인들은 정작 말을 탄 주인공 한 명조차 좀처럼 따라잡지 못하고, 조인성은 수없이 외계인에게 얻어맞아 공중으로 날아가면서도 끝내 쓰러지지 않는다. 그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 마치 죽지 않는 슈퍼히어로, 아니 '슈퍼맨'에 가까운 존재처럼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외계인보다 조인성이 더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특히 외계인과의 도로 총격전은 편집과 CG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못한 탓인지, 마치 어린 시절 게임팩으로 즐기던 16비트 액션 게임 속으로 배우들이 들어간 듯한 이질감을 남겼다. 불사의 존재를 표현하려는 연출 의도는 분명했지만, 네 발로 질주하는 외계인의 CG는 같은 동작을 복사해 붙여 넣은 듯 반복적으로 느껴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 패턴이 읽히는 존재로 변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영화 <호프>를 보는 내내 끝까지 붙들고 있던 '희망(Hope)'마저 그 순간 조용히 내려놓게 됐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 영화 <호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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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호프>를 실패작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나홍진 감독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와 숨 막히는 긴장감을 조율하는 연출력은 여전히 건재했고, 배우들의 연기 역시 스크린을 압도할 만큼 강렬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단순한 기술적 완성도가 아니라, 후반 작업 과정에서 작품이 가진 고유한 결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호프>는 배우 박영규의 촬영 분량을 통째로 편집하고, CG를 보강하는 등 개봉 직전까지 대대적인 재편집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물론 이는 더 나은 완성도를 위한 치열한 고민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듭된 수정과 타협 과정은, 개봉을 앞둔 시간적 압박 속에서 나홍진 감독 특유의 거칠고 생생한 긴장감과 선명한 목소리를 희석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어쩌면 <호프>의 아쉬움은 무언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고민과 수정 과정 속에서 정작 지켜야 했던 작품만의 날 선 개성이 깎여나갔다는 데 있다. 차라리 칸국제영화제 출품 당시의 버전이 감독이 처음 의도했던 방향에 더 가까운 결과물이었다면,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더라도 그 작품 그대로 관객에게 선보이는 선택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돌이켜보면 영화에 대한 실망은 작품 자체의 한계와 함께, 10년 만에 돌아온 나홍진이라는 이름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기대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개봉 전부터 여러 유명 영화평론가와 영화 전문가들의 극찬을 유튜브와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하며 기대치는 한껏 높아졌고, 자연스럽게 영화에 대한 '완벽함'을 기대한 채 극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각자의 경험과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주관적인 예술이다. 다른 이들의 호평은 작품을 바라보는 하나의 참고가 될 수는 있어도, 내 감상을 대신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었다.
<호프>를 보는 내내 왜인지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머릿속을 스쳤다. 당대 한국 영화 역사상 전례 없는 자본과 최첨단 CG를 쏟아부었음에도, 정작 작품이 지닌 본질적인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하며 대중에게 외면받았던 아픈 기억의 작품이다.
물론 두 영화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시대를 앞서간 기술적·산업적 도전의 좌절을 보여준 작품이었다면, <호프>는 성장한 한국 영화 산업 안에서 장르적 도전과 완성도를 둘러싼 고민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만 두 작품 모두 감독의 과감한 시도가 관객들의 기대와 맞물리면서, 작품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묘한 공통점을 가진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후 24년이 지났지만, 창작자의 이러한 불확실한 도전을 뒷받침하는 한국 영화계의 제작 시스템은 여전히 물음표를 남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의 좌절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장르와 표현 방식에 도전하려는 움직임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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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인 흥행의 서막? 나홍진의 '호프'가 남긴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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