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등록 2026.07.18 14:27수정 2026.07.18 14:30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며칠 동안 장맛비가 오락가락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가 그치면 숲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흙은 얼마나 촉촉해졌을까. 계곡물은 얼마나 힘차게 흐르고 있을까.
비가 그친 토요일(7월 11일) 아침,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요 며칠 비가 와 숲이 참 좋을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는 약속하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닿는 순간이 있다. 서로의 생각을 미리 읽은 듯한 그 짧은 한마디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북한산으로 향했다.
서울 은평구 백화사 앞길에 차를 세우고 산을 바라보니 운무가 능선을 따라 천천히 흘렀다. 물기를 머금은 바위는 얇은 유리막을 씌운 듯 반들반들 빛났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비가 지나간 뒤에만 만날 수 있는 깊고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오늘은 의상봉까지 천천히 걷자."
"그래. 오늘은 숲을 많이 보면서 가자."

▲여름산 풍경 나리꽃과 계곡물 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김남정
우리는 북한산 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일하던 내시들의 묘역이 남아 있어 붙은 이름이다. 대부분 흙길이라 발이 편안하고 울창한 숲이 이어져 사계절 사랑받는 길이다.
내시묘역길에서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사당 암문 표지판을 따라 의상봉으로 향하는 샛길에 들어섰다. 그 순간 휴대전화에서 서울시 폭염주의보를 알리는 재난문자가 울렸다. 폭염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오늘 산행이 결코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산행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땀을 흘리기 때문에 탈수와 열탈진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갈증을 느끼기 전에 물을 조금씩 자주 마시고, 전해질을 보충할 수 있는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또한 무리하게 속도를 내기보다 그늘에서 자주 쉬며 몸의 열을 식혀야 한다. 우리도 이런 점을 고려해 평소보다 물과 얼음물은 물론 과일과 간식까지 넉넉하게 챙겨 왔다.
그런데 숲 안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큰 나무들이 햇볕을 막아주어 길 대부분이 그늘이었다. 발밑의 흙은 폭신했고, 비를 머금은 숲에서는 촉촉한 흙냄새와 나무 향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밖은 폭염이라는데 숲은 정말 다르네."
남편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계곡에서는 쉼 없이 물소리가 들렸다. 장맛비를 머금은 계곡물은 바위에 부딪히며 힘차게 달렸고, 그 소리를 들으며 걷는 것만으로도 몸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노란 나리꽃은 비를 흠뻑 맞은 덕분인지 더 선명한 빛으로 숲을 밝히고 있었다.
6월의 산이 연둣빛 새잎과 들꽃이 주인공인 계절이라면, 7월의 산은 장맛비가 빚어낸 생명의 풍경이다. 6월에는 바람이 숲을 흔들고 함박꽃이 산을 밝혔다면, 7월에는 계곡물이 숲을 깨운다. 마르던 계곡은 다시 숨을 쉬고, 바위에는 이끼가 짙어지며, 숲 바닥에는 작은 생명들이 앞다투어 모습을 드러낸다. 같은 산인데도 계절이 바뀌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숲속 생명 비 온 뒤라 여러 가지 버섯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김남정
습도가 높아 땀이 금세 온 몸에 흘러내렸다. 잠시 멈춰 얼음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지나 온몸으로 번지는 순간, 다시 걸을 힘이 생겼다. 그때 길가에 작은 버섯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봐. 우산처럼 생겼네."
조금 더 가니 붉은 버섯도 모습을 드러냈다. 비온 뒤 숲에서는 버섯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버섯은 낙엽과 죽은 나무를 분해해 숲의 양분을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는 중요한 생물이다. 아름다운 모습에 손이 가기도 하지만 독버섯이 많아 채취하지 않고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의상봉에 닿았다. 정상에서는 아까와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산을 감싸던 운무는 걷히고 햇살이 능선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배낭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반으로 나누었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땀 흘려 오른 뒤 먹는 사과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어떤 과일보다 시원했고, 그 한 조각은 몸속 깊이까지 생기를 채워 주었다. 산에서는 음식의 값이 아니라 걸어온 시간이 맛을 만든다는 말을 그때 다시 실감했다.

▲의상봉에 오르니 파란 하늘이 보였습니다. 여름 산에서 느낄 수 있었던 풍경입니다.
김남정
정상에 서면 늘 같은 생각에 이른다. 산은 빨리 오르는 사람보다 자신의 걸음으로 끝까지 걷는 사람을 받아준다. 앞만 보고 서두르면 꽃도, 버섯도, 계곡물도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걸음을 늦추면 숲은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내어준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산에 오를 때마다 서둘러 살아온 것은 자연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잠시 바람을 맞으며 쉬었다가 국녕사 방향으로 내려왔다. 국녕사는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사찰이다.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세워졌다고 한다. 경내에 들어서면 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큰 불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을이면 단풍이 절을 둘러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경내를 지나 계곡에 도착해 손을 물에 담그는 순간 손끝이 얼얼할 만큼 차가운 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서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와는 또 다른 마음이었다. 몸은 더 지쳤지만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나무와 바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숲에서는 저절로 삶의 속도를 늦추게 된다. 비가 오면 비를 견디고, 햇볕이 들면 다시 잎을 펼치며,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억지로 서두르지 않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 가장 오래가는 힘이라는 사실을, 여름 산은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날 우리가 걸은 코스는 백화사 앞길에서 출발해 북한산 둘레길 10구간 내시묘역길을 지나 의상봉에 오른 뒤 국녕사를 거쳐 다시 백화사 앞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장맛비가 간간히 지난 북한산은 더운 여름을 건너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천천히 걸을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인다는 것, 자연은 서두르지 않아도 제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그리고 함께 걷는 사람과 나누는 짧은 대화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것을.
폭염이 이어지는 요즘이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좋다. 하루쯤은 비 온 뒤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계곡물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길 권하고 싶다. 아마 내려오는 길에는 올라갈 때보다 마음이 조금 더 시원해져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
책과 영화를 읽고, 글을 씁니다.나이 들어가는 삶의 감각과 가족. 부부의 시간, 일상에서 건져 올린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공유하기
폭염경고 문자가 울린 날, 북한산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