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가지 호호 불어가며 조물조물 무치면, 슴슴한 건강의 맛

간장 2숟가락, 고추장 1숟가락, 마늘과 참기름으로 완성한 '가지무침'

등록 2026.07.19 14:49수정 2026.07.1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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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연이틀 동안 회사 일이 바빠서 집에 점심을 먹으러 오지 못했다. 오전 근무를 하고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출근을 했다. 그러다 보니 며칠간 따로 반찬을 하지 않았다. 오늘 마침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뭐라도 준비를 하려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며칠 전 가지 반찬이 먹고 싶다는 남편의 말이 생각나 사다 둔 오이와 가지가 눈에 들어와 봉지째 꺼냈다.

푹푹 찌는 찜통 같은 더위가 계속 이어질 때 빠지지 않고 준비하는 것이 있다. 바로 오이와 양파 그리고 비트다. 먹기 좋게 잘라서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간식 대용으로 먹으면 더위에 지친 몸이 회복되는 느낌이 든다. 이번에는 오이를 아삭하게 무쳐 반찬으로 올릴 작정이었다. 가지도 무침으로 만들기로 했다. 원래는 가지 냉국을 만들려고 하다가 아직 해초 냉국이 남아 있어 계획을 바꿨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앞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가지, 고추, 오이 등 채소들이 메마르지 않도록 물을 뿌려주고 거름을 주는 일은 주로 아버지가 하셨다. 아버지는 열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줄기가 옆으로 꺾이지 않도록 지지대를 깊숙이 찔러 넣고 끈으로 조심스럽게 매듭을 지어주셨다. 그 팽팽한 끈은 식물의 생명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여름이면 그 텃밭에서 딴 오이나 가지로 반찬을 만들었다. 아침 일찍 들로 나가 뉘엿뉘엿 해가 질 때야 돌아오시는 부모님을 위해, 육 남매의 막내딸이었던 나는 아홉 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개울가 빨래터로 향하고 엄마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조막손을 놀려 반찬을 만들었다. 고단한 몸으로 돌아온 엄마는 막내딸이 차려놓은 밥상을 마주하면 피로가 다 가신 듯 얼굴이 환해지셨다.

엄마는 주로 가지를 밥 위에 쪄서 손으로 쭉쭉 찢어 무쳐주시거나 가지 냉국을 만들어 주셨다. 냉국에 띄울 얼음을 사러 두 살 터울인 막내 오빠와 주황색 바가지를 들고 얼음집으로 달리던 기억이 선하다. 아버지가 얼음에 칼을 대고 망치로 칼자루를 통통 두드리면, 단단한 얼음이 잘게 부서졌다. 마당 들마루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모깃불을 피워가며 그 시원한 냉국을 퍼먹던 기억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친 눈 맑게 하는 자연의 처방전

자연밥상 오이무침, 가지무침, 고등어구이 그리고 해초냉국으로 점심 한 끼
▲자연밥상 오이무침, 가지무침, 고등어구이 그리고 해초냉국으로 점심 한 끼 황윤옥

채반에 10분 정도 쪄낸 뜨거운 가지를 호호 불어가며 결대로 찢어낼 때 약간은 뜨끈하면서도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뙤약볕을 견디며 보랏빛으로 여문 가지는 거친 혈관을 보듬고 지친 눈을 맑게 하는 자연의 처방전이라 해도 될 것 같다. 간장 2숟가락, 고추장 1숟가락, 마늘과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냈다. 이렇게 하면 초장 맛이 확 올라오면서 감칠맛도 난다. 아삭한 오이무침을 버무려 담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 한 마리를 지난번에 산 나무 받침판 위에 통째로 얹었다.


가지찌기 채반에 가지를 찌고 있어요
▲가지찌기 채반에 가지를 찌고 있어요 황윤옥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땀방울을 송골송골 흘리며 들어선 남편이 코를 킁킁거렸다. 주방 가득 퍼진 참기름 내음과 고등어 굽는 냄새에 지친 기색이 금세 가시며 얼굴 가득 웃음이 돌았다. 나무 받침판 위에 턱 올려진 고등어와 보랏빛 가지나물을 보더니, "와, 잔칫상 같네!" 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릇 하나 건너뛰었을 뿐인데, 소박한 식탁은 이내 예전 시골 들마루에서 먹던 그리운 밥상으로 변해 있었다.

남편은 젓가락으로 가지무침을 듬뿍 집어 입에 넣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사 먹는 건 너무 달고 짠데, 당신이 무쳐준 건 삼삼하면서도 속이 편안해."

며칠 전 툭 던진 말을 잊지 않고 상을 차려낸 아내의 손길이 고마운지 남편은 밥그릇을 비우는 내내 숟가락질이 바빴다.

예전에는 나물 반찬을 즐겨 먹지 않던 남편이 요즘은 고기보다는 나물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게 나이를 먹어서인지 건강을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젊을 땐 고기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이젠 이런 소박한 나물이 보약 같다는 남편의 말에 문득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나물 맛을 알면 인생의 맛을 아는 것"이라고 엄마가 살아계실 때 해주신 말씀을 남편도 나처럼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강한 양념을 멀리하고, 제철 향을 수줍게 내는 나물처럼 우리 부부도 그렇게 슴슴하게 늙어가는 중인가 보다.

자연 밥상을 자주 먹으니 요즘 건강해지는 것 같다는 남편. 나무 도마 위의 반찬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는 모습을 보니 주방 감독으로서 뿌듯함이 차오른다.

거친 흙을 뚫고 나와 제 향을 지켜낸 오이와 가지처럼 우리 삶도 그리 담백하고 단단하게 익어가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가지무침 #가지냉국 #오이무침 #채소 #엄마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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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를 주로 씁니다. 가끔 음식 이야기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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