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문산 만일사 대웅전
이완우
만일사는 순창 고추장의 시원지라는 설화가 전승된다. 이성계가 이곳에 머물 때, 민가에서 고추장을 올렸다. 왕이 된 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하여 순창 고추장을 진상하게 했다고 한다.
고추는 임진왜란 무렵에 전래된 작물로 알려졌다. 산초(山椒)나 후추(胡椒, 후초)와 같은 매운맛 향신료로 만든 '초장(椒醬)'이 예로부터 있었다고 한다. 매운 음식을 즐기던 전통 식문화가 이 지역의 특산물로 발전해 온 과정을 만일사 설화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이해된다.
회문산이 가진 '은둔과 저항의 역사'를 말해주는 조선 후기의 사료가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긍익, 1776년)에 기술된 내용으로 '한국고전종합DB, 연려실기술 제17권/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에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 있다.
갑오년 여름에 토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천명 만명으로 떼를 지었다. (중략) 남원 등 일곱 고을 군사가 협력하여 회문산(回文山)에 모여 있는 도적을 잡는데,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찍어내고 사면으로 공격하여 포위하니, 도적들이 지탱하지 못하여 높은 곳에 오르기도 하고 험한 곳에 웅거하기도 하였으나, 연일 굶주리고 피곤하여 능히 싸우지 못하였다. 관군이 밤을 타서 백여 명을 잡아 죽이니 회문산 길이 비로소 소통되었다.
임진왜란 침략의 2년 뒤인 갑오(1594)년은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교섭이 진행되던 때였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전란 중에 가렴주구와 사회 질서 혼란으로 생계를 잃은 유민들의 무리를 조정에서는 '토적(土賊, 지방의 도적)'으로 규정하고 토벌하였다.
1594년 회문산 도적 사건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회문산은 지형이 험준하여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이자 은거지로 활용되었다. 관군이 진입하기 어려운 험지였기 때문에, 관군은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찍어내어' 길을 만들고 포위하는 방식의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다.
회문산이 시대의 변곡점마다 저항과 갈등이 존재했던 역사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1894년, 동학혁명에 참여한 동학군의 소수가 우금치 전투 이후 회문산에서 몇 년을 은거하고, 이후 천도교인으로 삼일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회문산은 대한제국 시대에 의병들의 활발한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향토 읍지인 순창군지(淳昌郡誌)에 의하면 만일사의 회문산 산중 암자로 동암(東庵), 칠성암(七星庵)과 선적암(禪寂庵) 등이 있었다고 한다. 만일사와 흔적 없는 이들 암자는 회문산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듯하다. 회문산 만일사는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을 지키며,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상처 입고 산화한 모든 이들의 넋을 달래는 '해원(解冤)의 사찰'로 다가왔다.

▲ 만일사 도량 앞 장독대와 전경, 만일사 앞은 깊은 미륵정이 계곡이 있다.
이완우
점심때가 되어서, 임실 강진면 갈담 장터에서 다슬기 식당을 찾았다. 이곳 섬진강의 갈담 다슬기는 지역 명물이다. 다슬기가 대개 길쭉한 나선형(탑형) 고동 같은 형상인데, 임실 강진 갈담 다슬기는 팥다슬기라 하여 팥알처럼 둥글고 도톰한 것이 특징이다.
교실 밖의 길동무 여행 참여자들이 몇 시간을 함께 차를 타고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직 할 이야기가 많았다. 북 카페의 아늑한 자리에서 각자의 생활의 즐거움과 탐구 내용을 펼쳐 놓았다.
회문산을 걸으며 사색하고 대화하면서, 역사의 아픔과 자연의 생명력은 길동무들의 가슴 속에 묵직한 울림으로 남았다. 갈등의 역사를 간직한 산자락을 걸으며 상생과 화해의 길을 되새길 수 있었다. 강산은 동강 났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 굽이진 길마다 새로운 생명의 꽃이 피어나고 평화로운 산들바람이 불기를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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