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에서부터 남색이마잠자리, 된장잠자리, 밀잠자리
이정미
여름이면 어김없이 우리들 곁에서 계절을 보냈던 잠자리가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어 형제 카카오톡 대화방에 보냈다.
형제의 반응을 보며 웃음보가 터졌다. 형제들에게도 우리들 어린 여름날 한 장면이 소환되었나 보다. 기억력이 좋은 작은 언니가 기어이 '철비'라는 낱말을 우리들 앞에 문자로 형상화했다. 그 순간, '하하. 맞다. 철비라고 했었지!' 그 낱말 하나가 밑도 끝도 없이 우리가 뛰어 놀았던 넓은 공터로 나를 데려 갔다. 잠자리들이 여름 공기를 가르며 신나게 날아다니던 장면이 섬광처럼 반짝 그려지는 거다. 언니는 네이버 검색창까지 캡처해서 '철비'가 잠자리의 경남 지역 사투리임을 증명했다.
지난해 이맘때는 잠자리를 거의 보지 못했던 기억이다. 지난해에 비해 모기도 눈에 띄게 줄었다. 느루뜰에 잠자리가 날아드니 일석이조다. 나는 어린 날의 여름 한가운데로 시간 여행을 했다. 잠자리가 모기를 잡아 주니, 덕분에 나는 훼방꾼의 방해를 덜 받으며 여름밤을 즐기게 되었다. 발코니에 모기장을 치고 누우니 낙원이 따로 없었다.
여름은 밤의 계절
여름은 밤의 계절이기도 하다. 쨍한 햇볕도, 턱밑까지 차오르는 무더위도 밤이 되면 슬며시 고개를 숙인다. 열대야라 해도 하늘이 까매지고 사위가 어두워지면 푹푹 찌던 열기도 어둠 뒤에 살짝 얼굴을 감춘다. 그래서 여름날은 낮보다 밤이 좋다. 쨍한 해가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간 여름밤은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다.
지난 연휴 사흘을(16일~18일) 느루뜰에서 보냈다. 말하자면 여름 사흘 밤을 느루뜰 발코니에서 시골의 어둠과 손잡고 지냈다는 뜻이다. '느루뜰멍'이라 해야 할까. 사흘 밤을 어둠에 둘러싸인 하늘, 마을, 들을 멍때리고 바라보며 보낸 것이다.
사실 나는 잠을 자지 않는 한 줄기차게 사부작 대며 무언가를 하는 타입이다. 심지어 책을 보다가도 수시로 핸드폰을 뒤적이고 글을 쓰면서도 생각은 수십 리 먼 곳으로도 갔다 오곤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한 두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아, 이게 되는구나'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그래도 되는구나.
"평화롭다."
옆에서 멍때리고 있던 남편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다. '평화롭다' 이런 상태를 언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이 가장 적절할까. 나도 덩달아 "그러게. 참 평화롭다"고 중얼거렸다.
꽃을 집으로 데려 오며
지난 주 농막 마을에 놀러 온 원예 전문가인 언니는 꽃잎이 시들고 씨가 맺히기 시작한 백일홍을 따서 씨앗을 발라내며 말했다.
"이 정도 되면 씨앗이 다 생겼다고 보면 돼요. 이렇게 씨앗을 발라서 쓱쓱 흩어 놓으면 싹이 나요."
느루뜰 화단 백일홍, 코스모스, 끈끈이대나물, 금계국도 씨앗이 맺힌 것들이 제법 있다. 나는 언니가 알려준 대로 씨앗이 맺힌 꽃대를 가위로 잘라냈다. 봄에 꽃씨를 뿌릴 때 촘촘하게 씨앗을 놓는 바람에 지금도 꽃밭이 비좁다.
꽃씨가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내버려 두면 꽃밭은 더 비좁아 질 테다. 미리 꽃씨를 받아 느루뜰 진입로 가장자리에 적당히 뿌려두면 씨앗은 알아서 싹을 틔우겠지. 그러면 느루뜰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이런 일들은 재미있다. 사부작대며 꽃대를 자르고 적당한 땅에 씨앗을 뿌리는 일은 리듬감이 있다. 한 더위에도 숨통 한 줌 된다고 할까.

▲ 씨가 맺힌 꽃대를 잘라 씨앗을 발라내고 적당한 땅에 놓았다.
이정미
'2주 후엔 이 꽃들이 다 져버리는 건 아닐까?'
다음 주에는 가족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 느루뜰에 올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 사이 꽃이 져버릴까 염려되었다. 내 밭의 꽃이건만 나는 한 번도 그들을 꺾어서 집으로 가져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돈 주고 꽃을 사면서도 말이다. 꽃은 꺾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보고 기뻐하고 사진을 찍는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꽃밭의 풀을 뽑다가 노란 백일홍 꽃대가 꺾어지는 바람에 그것을 가위로 반듯하게 잘랐다. 투명 플라스틱 컵에 담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랬더니 순간 테이블이 온통 노랗고 명랑해지는 것이 아닌가. 작은 존재 하나가 온통 한 세계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왜 이 꽃들을 집으로 데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 느루뜰 해바라기, 코스모스, 백일홍을 집으로 데려가는 길
이정미
노랑, 꽃분홍, 주홍 백일홍 한 송이씩 가위로 잘랐다. 해바라기가 피어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집으로 가져가기 좋을 만한 크기로 두 송이를 싹둑 잘랐다. 분홍 코스모스도 몇 가닥 보탰다. 아주 귀여운 꽃다발이 되었다. 투명 플라스틱 컵에 물을 담아 꽃다발이 쓰러지지 않게 꽂았다.
느루뜰 향기가 평일에도 우리 집에 닿아 연결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몽실몽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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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몽실몽실, 가족 여름 여행 앞두고 데려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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