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 대기실 풍경. AI생성 이미지
오마이뉴스
병원 대기실이다. 순번 전광판에 이름 넉 자가 뜬다.
"쑨셴루이"
옆자리의 어린이 환자가 전광판을 올려다보더니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는다. "쑨, 셴, 루, 이." 아이 엄마가 화들짝 아이를 제지한다. "하지 마." 孫賢瑞(쑨셴루이)씨는 웃어 보인다. 아이가 무슨 잘못이겠는가. 낯선 것을 만나면 소리 내어 읽어 보는 것이 아이들이 글을 배우는 방식이다. 다만 매번, 쑨셴루이씨는 그 순간이 어색할 뿐이다.
아이는 왜 하필 그의 이름만 소리 내어 읽었을까. 그리고 엄마는 왜 황급히 아이를 막았을까. 그 이름이 대기실의 다른 이름들과 다르다는 것을, 소리 내어 읽으면 실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른은 알기 때문이다. 전광판은 그의 순서를 알렸을 뿐인데, 동시에 그의 출신까지 게시한 셈이다.
그는 한국에서 '손현서'로 불리길 원한다. 전광판에 '손현서'가 떴다면 어땠을까. 소리 내어 읽는 아이도, 황급히 아이를 막는 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 석 자의 주인이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이다. 이름을 보았을 때 국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름 본연의 기능이 아니다.
그의 이름에도 뜻이 있다
孫賢瑞. 어질 현(賢), 상서로울 서(瑞). 현명하고 상서롭길 바라는 뜻이 담겼다. 아버지가 한 자 한 자에 바람을 담아 지어준 이름이다(孫賢瑞는 이 글에서 고안한 이름이나, 한국에 체류하는 중국인이라면 일반적으로 겪는 일이다 - 기자 주).
그런데 한국살이 20년이 다 되어 가는 그는, 이 나라에서 여전히 '쑨셴루이'다. 외국인등록증도, 은행 계좌도, 병원 차트도 모두 중국 표준어 발음을 한글로 옮긴 표기다. 외국인의 이름은 원지음(原地音), 곧 현지 발음대로 적는다는 원칙 때문이다.
2024년 행정안전부가 '외국인의 성명 표기에 관한 표준'을 시행하며 이 원칙은 더 견고해졌다. 기관마다 표기가 달라지는 혼란을 정리한다는 취지는 좋았다. 다만 한자 이름의 주인에게 한국식 독음(讀音)이라는 선택지는 없다. 1편에서 본 한글 이름 병기 제도는 동포와 재한 화교에게만 열려 있어, 중국에서 온 한족인 그는 제도 밖에 서 있다.
존중의 역설
원지음주의가 원래 그 예의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역설이다. 우리가 모택동을 마오쩌둥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한 것은, 남의 이름을 우리 식으로 바꾸지 말고 그가 제 나라에서 불리는 소리대로 불러 주자는 존중의 원칙이었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재일 한국인 최창화 목사가 자신의 이름을 일본 한자음 '사이 쇼카'로 읽은 NHK에 맞서 십여 년을 싸웠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청구를 기각했지만 판결문에 남겼다.
"성명은 개인의 인격적 상징이며, 정확하게 호칭받을 이익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재판에서는 졌지만 관행은 바뀌었다. NHK는 1985년부터 한국인 이름을 한국어 발음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법이 아니라 싸움이 바꿨다.
최 목사의 싸움과 손현서씨의 바람은 실은 같은 요구이다. 내가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것. 다만 최 목사에게 그것이 원지음이었고, 손현서씨에게는 한자의 한국식 독음일 뿐이다. 당사자의 뜻을 존중하려고 태어난 원칙이 규정이 되어, 이제 당사자의 뜻을 가로막는다.
원지음이 절대 규범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시진핑이라 부르지만 중국은 '이재명'을 '李在明'이라 쓰고 '리짜이밍'이라고 중국 한자음으로 읽고, 일본도 시진핑을 '슈 킨페이'라 부른다. 한자문화권의 호칭은 나라마다 달랐던 관습이고, 관습이라면 예외를 둘 수도 있다.

▲중국 포털 사이트의 이재명 대통령 표기 바이두 갈무리
오마이뉴스
베트남도 한자문화권이라는 사실은 가끔 잊힌다. 강의실에서 만난 베트남 유학생 후잉꾸억아잉(가명), 한자로 黃國英. 그 이름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알았다. 이 학생과 나는 같은 황(黃)씨였다. '후잉'이라는 말소리에서 黃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같은 뿌리, 같은 글자, 다른 소리가 로마자와 원지음 표기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어떻게 호명하는 것을 원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베트남식 발음 그대로 '후잉꾸억아잉', 또는 베트남에서 부르듯이 마지막 글자만 따서 '아잉 씨'로 불리기를 원했다. 제 나라 소리로 제 이름이 불리는 것이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 선택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핵심은 어느 쪽이 옳으냐가 아니라, 그 선택이 누구의 것이냐다. 지금 선택권은 당사자가 아니라 표기 원칙과 행정 서식이 쥐고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름
언어학에 유표성(有標性)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는 "키가 얼마나 크니?"라고 묻지, "키가 얼마나 작니?"라고 묻지 않는다. '크다'가 아무 전제 없이 쓰이는 기본값, 곧 무표(無標)라면, '작다'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만 나서는 유표 형태다.
전광판 위의 '쑨셴루이'는 유표적이다. 아이는 낯설어 소리 내어 읽고, 어른은 그 읽기를 서둘러 막는다. 그 엄마의 황급한 제지야말로 이 이름의 유표성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증거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표의 자리, 그냥 다음 순서의 환자가 되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성실히 20년을 산 사람의 이 소박한 바람이, 과한 욕심은 아니지 않은가.
방법은 어렵지 않다. 한자 이름이 있는 외국인이 원하면 한국 한자음 표기를 병기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문을 여는 것. 원하는 사람은 '손현서'로, 아닌 사람은 '쑨셴루이'로 불릴 수 있도록 말이다.
이웃 일본은 외국인이 일상에서 실제로 써 온 통칭명(通稱名)을 증빙과 함께 주민표에 본명과 함께 등록하면, 이를 은행이나 국민건강보험 등의 행정 업무에서 사용할 수 있다. 쓰고 싶은 이름을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을 행정에서 뒤따라 인정해 주는 방식이다. 통칭명의 사용 실적을 증명해야 하는 나름의 문턱은 있지만, 순전한 행정 절차이다. 이름은 부르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불리는 사람을 위해 있다.
"손현서 환자분."
전광판의 그 석 자를 굳이 소리 내어 읽는 아이도, 아이의 입을 막는 엄마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부르는 사람도 한결 발음이 편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
언어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사회와 일상에서 오가는 말들이 어떤 의미를 만들고 어떤 힘을 가지는지 늘 궁금한 사람입니다.
공유하기
베트남 학생이 나랑 같은 '황씨'... 이름 들어도 몰랐던 이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