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서기관의 행적을 증언하는 박공환의 증언 광주지방검찰청 기세훈 검사의 증인 박공환 서기관 조서의 일부. 방 서기관의 행적을 언급하고 있다.
광주지방검찰청(최천 외 2인 살인 피의 사건)
방 서기관의 행적을 언급하고 있다. 오후 5시께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박공환 가족과 함께 별실에서 총성과 적기가를 들으며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23일 오전 진압군은 순천읍 주민들에게 순천북국민학교(현 순천대학교 위치)로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운동장에서는 군과 경찰이 몸수색을 실시했고, 시민들은 교정에 모여 대기했다. 박공환은 그곳에서 방 서기관과 다른 법원 직원들을 다시 만났다. 서로 무사함을 반기던 것도 잠시였다.
그는 "오전 10시경 한 경찰이 갑자기 '반도다!'라고 외치며 방 서기관을 끌고 갔고, 경찰 2~3명이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구타했다"고 증언했다.
잠시 후 박공환은 평소 알고 디내던 우체국 직원들과 박찬길 검사를 만났다. 그때 박 검사는 "이제는 살았다"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복 차림의 남성들과 군복을 입은 경찰이 나타나 박찬길 검사를 지목한 뒤 집단 구타하고 끌고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박공환은 학교 운동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 날 오전, 총살장으로 끌려가는 10여 명의 무리 속에서 방 서기관과 박찬길 검사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잠시 뒤 총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총살 장면은 직접 보지 못했다.
또 다른 동료인 이의신 서기관도 "수십 명의 총살 대상자 가운데 박찬길 검사와 방 서기관이 함께 있었다"고 진술했다. 반면 기세훈 검사가 조사한 다른 증인들은 대부분 방 서기관을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20여 명의 증인 가운데 방 서기관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한 사람은 같은 법원에서 근무했던 박공환과 이의신 두 사람뿐이었다.
방 서기관이 왜 '반도'로 지목됐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 어디에도 그가 반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동료들은 그를 성실한 법원 공무원으로 기억하고 있다.
최근에는 가족들의 명예회복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방 서기관의 외손녀는 여순사건 진상규명 신청을 한 상태이고, 방 서기관과 함께 희생된 박찬길 검사는 이미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여순사건위원회)에 의해 억울한 희생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방 서기관의 마지막 행적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그 역시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방기환의 이름, 나이, 사망일, 직급 차이 문제 |
여순사건 관련 호남신문 보도(1948. 9. 20)에 따르면 박찬길 검사와 함께 처형당한 순천지원 서기의 이름을 '방기환'(30세)이다. 하지만 제적부를 확인한 결과 그의 본명은 방계환(方季煥)이었고 나이도 25세였다.
제적부에 따르면 방계환은 여수군 쌍봉면 선원리 출신으로, 1923년 1월 9일 출생하여 1944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사망 시각은 1948년 10월 25일 오전 10시로 기록돼 있다. 가족은 이듬해 사망 신고를 했다.
다만 이 기록은 실제 처형 시점과 차이가 있다. 동료 박공환과 이의신의 증언은 모두 방 서기관이 10월 24일 오전 총살 대상자들과 함께 끌려나갔다는 사실을 일치되게 보여준다. 반면 제적부에는 다음 날인 25일 오전 10시가 사망 시각으로 기재돼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당시 혼란한 상황에서 실제 사망 시각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확인된 시점을 기준으로 사망 신고가 이뤄졌거나, 사후에 추정 기재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호적과 제적부에서 실제 사망일과 신고일, 기록일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유족에 따르면 방계환은 1948년 10월 당시 순천법원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한 게 틀림 없으며, 이는 지금 살아 있는 친척들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순천법원 서기관으로 일하다가 여순사건 당시 사망한 사람이 2명 곧 '방기환'과 '방계환'일 리가 없기에 두 사람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방계환이 당시 순천지원의 서기관이었다는 사실이다. 1948년 순천지원은 현재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조직이었다. 이 시절 서기관은 사실상 지원의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최고 실무책임자였다.
서기관은 재판기록과 조서 작성, 소송기록 관리, 영장과 판결 집행 등 법원 행정을 총괄하였다. 당시에는 법학을 공부한 인력이 많지 않았기에 방 서기관은 지역 사회의 엘리트 법률 실무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방기환의 직급은 아직 확인이 더 필요하다. 그의 외손녀는 외가 친척들의 기억을 전하며 "말 타고 다녔고, 그 동네에서는 서기라고 하면 다 알아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가족들의 기억 속 직함은 '서기'였던 셈이다. 반면 광주지검 인지조사서에는 방기환을 '서기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족의 구술과 공적 기록이 엇갈리는 만큼, 당시 인사기록 등 추가 사료를 찾아 확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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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라 불린 법원 서기관... 여순사건 희생자 방기환의 마지막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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