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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6.08.03 15:10수정 2026.08.03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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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문을 여는 순간,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아인슈타인과 간디, 베토벤까지. 인류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수백 명의 인물들이 한 공간에 서 있다. 흙으로 탄생한 조각들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다. 각자의 삶과 신념, 시대를 이끌었던 정신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또 하나의 역사다.
그 중심에는 조각가 홍순태(68)가 있다. 그는 오늘도 흙을 만지며 인물이 살아온 시간과 철학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 흙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예술로 사람과 시대를 이어가는 조각가 홍순태. 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 홍순태 작가의 손끝에서 완성되어 가는 인물 조각. 작품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역사 속 인물들의 정신을 담아내려는 작가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홍순태
조각이 아닌 시대를 빚는 작업
홍순태 작가는 지난 20여 년 동안 역사·문화·과학·정치·종교·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온 세계적 인물 500여 명의 테라코타 흉상을 제작해 왔다.
"이곳은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그분들의 정신을 잠시 모셔 둔 공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흙을 만지기 전에 먼저 책을 펼친다. 관련 자료를 읽고, 인물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업적과 사상을 깊이 연구한다.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흙을 빚기 시작한다.
홍순태 작가에게 인물 조각은 얼굴을 똑같이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과 시대정신을 흙으로 다시 해석하고, 후세에 전하는 또 하나의 역사 기록이다.

▲ 홍 작가는 얼굴의 형태보다 인물의 삶과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조각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홍순태
눈빛에 시대를 담다
"얼굴보다 삶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홍순태 작가의 조각 철학은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그는 작품을 시작하면 수많은 기록과 자료를 살핀다. 역사 속 인물일수록 남아 있는 자료가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같은 인물이라도 기록마다 모습이 다르고, 사진 한 장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당시 시대적 배경과 주변 기록을 분석하며 가장 설득력 있는 모습을 찾아낸다.
특히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눈이다. 눈빛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내면이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500여 명의 인물을 제작했지만 같은 얼굴은 하나도 없다. 위대한 인물일수록 외형보다 보이지 않는 정신을 표현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얼굴보다 먼저 그 인물이 가진 분위기와 삶의 무게를 느낀다.

▲ 홍순태 작가가 역사 속 인물 조각을 바라보며 작품 구상을 하고 있다. 그는 이름난 위인뿐 아니라 시대 속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인물들의 삶과 정신까지 기록하는 것이 조각가로서의 또 다른 사명이라고 말한다.
홍순태
방황 끝에 찾은 예술의 길
홍순태 작가가 처음부터 조각가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예술을 꿈꾸기보다 현실을 먼저 선택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건축을 공부했고, 군 복무를 마친 뒤에야 늦은 나이로 미술대학에 진학하며 비로소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조각가의 삶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40대 중반, 그는 인생의 방향을 잃고 깊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떤 작품을 남겨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했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다시 돌아보기로 했다. 그 시간은 좌절이나 실패가 아니라, 자신만의 예술 철학을 세우는 소중한 전환점이었다.
그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방황의 시간을 견뎌냈기에 그는 사람의 삶과 내면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홍순태 작가가 인물 조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외형이 아니라, 얼굴에 새겨진 '삶의 흔적'이다.

▲ 홍순태 작가의 작업실에 자리한 수백 점의 인물 조각 작품들. 역사 속 인물들의 얼굴에는 시대의 정신과 삶의 흔적을 담아낸 작가의 예술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홍순태
흙은 인간의 삶을 닮은 재료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은 가장 인간적인 재료입니다."
그에게 흙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다. 손끝의 온기와 숨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손으로 누른 흔적과 미세한 결까지 기억하는 살아 있는 매체다. 차갑고 완벽한 조형보다 사람의 체온과 손맛이 남아 있는 작품을 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흙은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또 하나의 언어다.
테라코타 작업은 흙을 빚는 순간부터 시작되지만, 진정한 작품은 그 이후의 시간을 견뎌야 비로소 완성된다. 형태를 만든 뒤에는 오랜 자연 건조를 거치고, 900도가 넘는 가마 속에서 뜨거운 불을 이겨내야 한다. 서두르면 갈라지고, 조급하면 무너진다.
홍순태 작가는 이 과정을 사람의 삶과 닮았다고 말한다.
"흙도 불을 견뎌야 작품이 됩니다. 사람도 시련을 이겨내면서 더 단단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기다림을 예술의 중요한 과정으로 여긴다. 충분한 시간을 견디고, 제 온도로 익어갈 때 비로소 작품은 생명력을 얻는다. 그의 테라코타에는 흙의 질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긴 기다림과 인내, 그리고 시간을 견뎌낸 삶의 흔적까지 함께 새겨져 있다.

▲ 사람의 얼굴을 단순히 닮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과 신념, 기쁨과 고난까지 담아내려는 조각가가 된 것이다.
홍순태
눈으로 세계를 새기다
홍순태 작가에게 눈조각은 또 하나의 도전이자 세계와 소통하는 예술의 무대였다.
차가운 눈 위에서 펼친 작업은 극한의 환경과의 싸움이었다. 국제 눈조각대회는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눈 덩어리를 작품으로 완성해야 하는 만큼, 조각 기술뿐 아니라 자연을 이겨내는 인내와 창의력이 요구된다.
그는 세계 최고 권위의 무대에서 수많은 한계와 마주했다. 일본 삿포로에서는 급격한 기온 변화로 작품이 무너질 위기를 겪었고, 중국 하얼빈에서는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미국 브레켄리지에서는 해발 2900m 고지대의 낮은 산소와 싸우며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하지만 극한의 조건은 그의 도전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그는 삿포로, 하얼빈, 브레켄리지 국제 눈조각대회를 모두 석권하며 세계 최초의 국제 눈조각 그랜드슬램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의미는 우승 자체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조각가도 세계 정상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린 것이 가장 기쁩니다."
그는 이 기록이 한 개인의 성취를 넘어 한국 조각의 가능성을 보여준 결과라고 말한다. 지난 1월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국제 눈조각대회에서도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작품을 완성했다. 추위와 시간의 압박 속에서도 그가 끝까지 붙잡은 것은 기술이 아니라 작품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다.
"눈조각은 결국 생각의 싸움입니다. 마지막을 결정하는 것은 작품 속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그가 출품한 작품 '내면의 기억'엔 전쟁이 남긴 상처와 평화에 대한 염원이 담겼다. 눈이라는 한시적인 재료를 통해 인간의 아픔과 시대적 질문을 표현한 것이다.
홍순태 작가에게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운 형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시대의 아픔을 바라보고, 사람들에게 생각할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눈 위에 새겨진 그의 조각은 녹아 사라지지만, 그 안에 담긴 인간에 대한 메시지는 오래도록 남는다.

▲ 세계 최초 국제 눈조각 그랜드슬램이라는 기록을 세운 그는, 수상보다 눈과 얼음이라는 자연의 재료를 통해 세계와 소통했다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둔다.
홍순태

▲ 세계 최초 국제 눈조각 그랜드슬램이라는 기록을 세운 그는, 수상보다 눈과 얼음이라는 자연의 재료를 통해 세계와 소통했다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둔다.
홍순태
아직 끝나지 않은 꿈, 세계역사인물박물관
500여 명의 인물을 빚었지만 홍순태 작가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300여 명의 인물을 더 제작할 계획이다. 유명한 위인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인물들의 삶도 기록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리고 평생 품어온 꿈이 있다. 바로 세계 최초의 '세계역사인물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이 책 속의 역사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사람과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에게 박물관은 작품을 모아 놓는 장소가 아니다. 인류의 정신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살아 있는 역사 공간이다.

▲ 홍작가는 외형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정신을 이해해야 진정한 얼굴을 빚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홍순태
흙은 역사가 되고, 예술은 기억이 된다
작업실을 나서며 다시 한 번 수백 개의 얼굴을 바라본다. 말없이 서 있지만 각각의 얼굴에는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세계 정상에 오른 눈조각 역시 그가 걸어온 긴 예술 여정의 한 장면일 뿐이다. 그의 손은 오늘도 새로운 인물을 찾고 새로운 역사를 빚는다. 흙은 시간이 지나 작품이 되고, 작품은 세월을 품어 역사가 된다.
홍순태 작가. 그는 오늘도 흙으로 역사를 빚고, 눈으로 세계를 새기고 있다.

▲ 홍순태 작가가 흙을 손에 쥐고 작품을 빚고 있다. 그는 흙을 인간의 삶과 가장 닮은 재료로 여기며, 손끝의 온기와 흔적을 통해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홍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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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열자 수백 개의 얼굴이... 시대를 빚어낸 남자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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