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그칠 때 짬짬이 산책을 나가는데 평소엔 쫄쫄쫄 흐르던 계곡에 폭포가 생겼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간절하다. '비야, 제발 그만 좀 내려주면 안 되겠니?'
노시은
대서(大暑 7월 23일)입니다. 이름부터가 '큰 더위'를 뜻하니, 달력의 글씨만 보아도 숨이 턱턱 막히고 아스팔트가 끓어오르는 맹렬한 불볕더위를 상상하며 내심 두려운 마음이 앞섰죠. 하지만 웬걸, 며칠째 장맛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네요.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보아도, 오후가 되어 찻물을 끓일 때도 하늘은 잿빛으로 잔뜩 찌푸린 채 굵은 빗줄기를 끝없이 토해냅니다.
큰 더위 대신 비 내리는 대서
한여름의 정점에, 그것도 큰 더위라는 묵직한 이름표를 단 절기에 며칠째 이어지는 지루한 장마라니요. 뙤약볕 대신 온 세상을 뒤덮은 물안개와 축축한 공기를 마주하며, 절기의 이름과 현실의 날씨가 어긋난 것은 아닌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그런데 옛 문헌을 뒤적여보니, 이 며칠째 쏟아지는 장맛비가 영 엉뚱한 불청객만은 아니었습니다. 원나라 시대의 학자 오징(吳澄)이 1년 24절기와 72후(候)의 기후 변화를 꼼꼼하게 관찰하고 정리해 편찬한 <월령칠십이후집해(月令七十二候集解)>를 보면, 대서를 세 가지 절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죠. 첫 번째는 썩은 풀에서 반딧불이가 나오는 시기(腐草为萤)요, 두 번째는 땅이 습기를 머금고 더위가 찌는 시기(土润溽暑)입니다. 세 번째는 이렇게 기록했더군요.
"큰비가 때맞춰 내린다(大雨时行)."
이 시기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큰비가 자주 대지를 때리며, 이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나면 무더위가 다소 누그러지면서 계절이 조금씩 입추(立秋)를 향해 건너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문헌의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창문을 거칠게 때리는 빗소리가 사뭇 다르게 들려옵니다.
현실은 장마가 끝난 뒤 8월의 진짜 찜통더위가 맹수처럼 도사리고 있겠지만, 지금 며칠째 쏟아지는 이 굵은 빗줄기 역시 대서라는 거대한 자연의 시간표 안에 아주 정교하게 짜여 있는 풍경인 셈이죠. 하늘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큰 더위 속에는 응당 큰비가 품어져 있어야 만물이 목마르지 않고 기나긴 여름을 버텨낼 수 있으니까요.
비 덕분에 기온은 살짝 내려갔을지 몰라도, 공기 중의 습도는 이미 포화 상태를 넘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방바닥은 끈적끈적하며, 피부에 닿는 공기마저 눅눅하고 텁텁하죠. 한의학에서는 이런 날씨에 몸속으로 차고 끈적이는 '습(濕)'이 파고들기 쉽다고 경계했습니다.
무덥고 습하다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거나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으면, 겉은 시원할지 몰라도 뱃속은 차가워져 비위가 상하고 기운이 처지게 됩니다. 겨울병을 여름에 다스린다는 '동병하치(冬病夏治)'의 오랜 지혜는 바로 이런 축축한 날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랍니다.

▲ 광동성에서 만들어진 영덕홍차. 봉황단총의 고향답게 제법 단총의 풍미가 느껴진다.
노시은
이렇게 몸이 무겁고 눅눅한 날에는 차가운 얼음보다 뜨거운 열기로 몸속의 습기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편이 훨씬 현명합니다. 차를 마셔야겠습니다. 대서를 장식할 찻잎은 중국 광둥성에서 온 영덕홍차(英德紅茶)입니다.
펄펄 끓여낸 뜨거운 물을 개완에 붓자, 검고 단단하게 말려 있던 찻잎들이 기지개를 켜듯 서서히 풀어집니다. 이내 맑고 투명하면서도 깊은 붉은빛의 탕색이 우러나죠. 코끝을 스치는 짙은 맥아향과 달콤한 꿀향, 그리고 농염하게 잘 익은 과일의 풍미가 무겁고 습한 공기를 가르고 번져나갑니다.
홍차와 대만 과자 펑리수
뜨겁게 우려낸 붉은 탕을 한 모금 천천히 넘깁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열기가 서늘해진 뱃속을 어루만지듯 따뜻하게 데워주고, 이내 콧등과 이마에 훅 하고 기분 좋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몸속 깊은 곳에 정체되어 있던 무겁고 찌뿌둥한 기운이 뜨거운 차 한 잔에 개운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빗소리를 훌륭한 배경 음악 삼아 마시는 이 뜨거운 홍차 곁에는 특별히 대만식 펑리수(鳳梨酥)를 다식으로 곁들였습니다.

▲ 습을 뜨거운 차로 밀어내고 심장의 기운을 북돋는다.
노시은
제가 궂은 비 내리는 날, 굳이 이 조합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의 옛 의서인 <황제내경>을 보면 "여름에는 심장을 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여름철 땀을 많이 흘리고 습기가 몸에 차오르면 비위(脾胃)의 기능이 뚝 떨어져 쉽게 지치고 입맛도 잃게 되죠.
이때 홍차가 품은 은은한 단맛은 비장을 보듬어주고, 그 이면의 쌉싸름한 맛은 심장으로 들어가 지친 심장의 양기(心陽)를 튼튼하게 끌어올려 줍니다. 다식으로 곁들인 펑리수의 주재료, 파인애플 역시 한의학에서 잃어버린 입맛을 돋우고 땀으로 빠져나간 진액을 채워주는(생진지갈 生津止渴) 훌륭한 여름 식재료로 꼽힙니다.

▲ 이 찻잔은 네덜란드 빈티지숍에서 구한 1992년 웨지우드 피터레빗 잔인데 평소에 이런 귀여운 것들을 사랑하여 모으는 편이다.
노시은
이 절묘한 이치는 입안에서 곧바로 증명됩니다. 먼저 뜨겁게 우려낸 영덕홍차 한 모금으로 몸속의 차갑고 끈적한 습(濕)부터 훅 밀어냅니다. 그리고 곧바로 산미 가득한 펑리수 한 입을 베어 무니 그 조화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홍차의 둥글고 다정한 단맛이 펑리수의 진한 버터 풍미를 우아하게 감싸 안으며 약해진 위장을 편안하게 달래줍니다. 여기에 펑리수 과육의 쨍하고 날카로운 산미가 톡 하고 터지며, 자칫 무거울 수 있는 홍차의 바디감을 경쾌하게 깨워 여름날의 피로까지 씻어내 줍니다.
따뜻한 홍차가 몸속의 눅눅한 습기를 밀어내면, 서늘하고 새콤한 파인애플이 좋은 수분을 채워주며 그야말로 완벽한 음양의 조화를 이룹니다. 궂은 날씨 탓에 배낭을 챙겨 산에 오르지 못하고 방구석에 발이 묶인 아쉬움 따위는, 절기의 이치에 꼭 맞는 이 완벽한 치유의 찻자리가 주는 감각적인 기쁨 속으로 흔적 없이 녹아 없어집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차를 거듭 우려 마시며 창밖을 봤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없습니다. 문득 무더운 여름방학 때 놀러간 할머니 댁에서 할머니께서 무시무시한 식칼로 커다란 수박을 가르며 툭 던지시던 말씀 하나가 뇌리를 스치네요.
"가뭄 뒤 수박이 더 맛있는 법이여."
과실이란 본디 잎이 타들어 갈 듯한 지독한 뙤약볕과 시련을 오롯이 견뎌내야만 그 안에 단맛을 옹골차게 응축하는 법입니다. 며칠째 물을 잔뜩 머금고 햇빛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밭에서 속절없이 비를 맞고 있을 지금의 수박들은 분명 속이 맹맹하고 싱거울 것입니다. 복숭아나 자두도 예외는 없을 테지요.

▲ 한 입 베어물면 진득한 파인애플이 가득한 펑리수는 대서에 잘 어울리는 티푸드이다.
노시은
뜨거운 홍차 한 잔으로 끈적이는 몸을 쾌적하게 달래면서, 저는 다음 수박을 쩍 하고 쪼개는 일은 조금 더 훗날로 미뤄두기로 다짐합니다. 며칠째 이어지는 이 장맛비 끝에 열린, 물맛만 가득한 싱거운 수박으로 한여름의 갈증을 달래고 싶지는 않거든요.
진짜 수박다운 수박,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을 때 입가에 끈적한 단물이 뚝뚝 흐르고 씨를 툭툭 뱉어내는 다디단 수박을 맛보려면 다가올 8월의 맹렬한 무더위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야 할 겁니다. 달콤함을 얻기 위해서는 뙤약볕의 시간도, 그것을 기다려주는 인내의 시간도 필요한 법이죠.
그러니 당장 밖에서 여름을 만끽하지 못한다고, 달콤한 과즙이 뚝뚝 흐르는 여름 과일을 맛보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며 조급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가 오면 비를 즐기며 뜨거운 찻물을 끓이고, 무더위가 찾아오면 그 속에서 기꺼이 땀을 흘리면 그만입니다. 다가올 8월의 맹렬한 폭염과 달콤함의 절정을 찍을 진짜 수박을 기다리는 일은 잠시 훗날로 미뤄둡니다.
지금은 제 앞의 개완에서 피어오르는 붉고 뜨거운 찻물의 온기, 그리고 창문을 쉴 새 없이 두드리는 서늘한 대서의 빗소리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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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낭 속의 영국 남자』, 『언제라도 티타임』, 『화요일의 티타임』의 저자. 세상 구경하고 차 마시며 글, 사진, 영상, 그림으로 삶을 기록합니다. 아직은 벌이가 시원찮은 유튜버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는 진심입니다. 좋은 기획과 재미있는 작업 제안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 비즈니스(출간·강의·글작업) 문의: peanutshol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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