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배롱나무와 다시 올라오는 꽃대 꽃밭
이인자
마당에서 시든 꽃대를 정리하고 있는데 출근하는 남편과 등교하는 딸이 마당으로 나왔다. 1분이라도 지체되면 발을 동동 구르는 딸 때문에 평소 남편은 시동을 켜기가 무섭게 출발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차를 움직이기 전 슬그머니 창문을 내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당신이 그렇게 꽃밭에 서 있으니까 뭐가 꽃인지 분간이 안 가네."
순간 내 귀에는 '꽃'이 아니라 '꽂'으로 들렸다. 바닥에 뭐가 잘못 꽂혀 있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옆자리에 앉은 딸이 "우웩" 하고 장난스레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고서야 남편이 던진 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삼겹살을 못 먹은 남편이 제대로 반항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갑자기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세수도 안 하고 부스스하게 머리만 묶고 나왔는데 '혹시 꾸미지 않은 내 모습도 아직 봐줄 만한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착각마저 들었다. 붉은 배롱나무 꽃이 갑자기 농염해 보였다.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 역시 출근 준비를 하러 거울 앞에 선 순간, 비명이 절로 나왔다. 그곳에는 꽃은커녕 막 부추밭에서 밭을 매고 나온 중년의 낯선 아줌마가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처참한 몰골을 보고 감히 '꽃'에 비유했다니 남편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나를 제대로 놀려먹을 작정이었거나 분명 내게 바라는 게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곧장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지금 내가 거울을 봤는데 아까 나보고 꽃이라고 한 거, 욕인 거지?"
남편이 웃는다. 혹시 돈이 필요한 거냐고 물었는데, 그 뒤의 말은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냥 아침에 기분 좋으라고 한 소리라는 것이다. 눈치가 있다면 끝까지 자신의 눈에는 진짜 그렇게 보였다고 둘러댔어야 했다. 가뜩이나 요즘 내가 부쩍 나이 들고 있다는 사실에 고민하고 있는데 말이다.
평소에는 나이 듦을 인정하고 내면이 깊어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깊어지는눈가의 주름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만난다.
중년의 가꾸기란
도서관 신간 서가에서 제목만으로도 손이 가는 책 하나를 대출했다. 와카타케 치사코의 에세이 <인생의 오후에도 축제는 벌어진다>. 55세에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해 63세에 당당히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저자는, 책 속에서 정신을 후려치게 만든 어느 소설의 대사를 인용한다.
"사람은 겉모습이 제일. 젊음을 갈고닦아야지, 늙고 나서 다듬으면 뭐 하겠어."
"속이 중요하다는 사람일수록 속이 비어 있어."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한 저자는 글을 쓰다 말고 세수를 하고 오랜만에 정성껏 화장을 했다고 한다. 꽃무늬 블라우스를 갖춰 입었더니 굽었던 등이 절로 펴지고 의욕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자신을 단장하는 일은 겉치레가 아니었다. 하루를 다시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 중년의 가꾸기란 젊음을 유지하려는 안간힘이 아니라 내 삶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태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값비싼 명품이나 요란한 피부과 시술까지는 필요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50대 중에 네가 제일 예뻐! 진짜?
오십 대가 된 첫번째 생일날, 아끼는 후배에게 손수건 한 장을 선물로 받았다. 손수건 모퉁이에는 '50대 중에 네가 제일 예뻐'라는 문구가 알록달록 새겨져 있었다. 솔직히 그때는 그 손수건을 들고 다니기가 싫었다. 오십 대에 접어든 것도 통곡할 지경인데, 손수건에까지 나이를 인증하는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예쁜 척할 만큼 자신 있는 외모도 아닌데, 누가 보고 비웃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50대 중에 네가 제일 예뻐 손수건이 말했다
이인자
그런데 다시 그 손수건을 펼쳐보니 이제는 그 한 문장이 자신감을 가지라는 주문 같다. 등을 저절로 펴게 하는 마법 같다. 20대, 30대의 팽팽함과 경쟁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외모를 존중하고, 자신을 더 사랑해 주라는 말임을 알기 때문이다.
문득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게 다 남편의 시답지 않은 농담에서 시작된 생각이 아니던가. 내 마음속 시든 생각 하나를 깔끔하게 따주고 나니, 새로운 다짐이 더 꼿꼿하게 올라오는 것 같았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살림은 대충 하겠다고 선언하고, 이제라도 못다 이룬 꿈을 펼치겠다며 혼자만의 시간에 갇혀 지내는 아내에게, '꽃밭의 꽃' 같다는 농담은 과분한 다정함이었다.
그러니 내일 아침에는 진짜 삼겹살을 구워줘야겠다. 내 목주름 사이 사이까지 삼겹살 냄새가 배일지라도 하루 정도는 괜찮다. 새벽은 내일 또 찾아올 테니까. 그리고 마당에 나갈 때도 세수는 꼭, 꼭, 꼭, 하기!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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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삶은 도서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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