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부천 대중교통의 발전과정

1930년 설립 후 안양·안산·오정·방화리까지 노선 확장… 친일광고 참여까지

등록 2026.07.23 16:17수정 2026.07.2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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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는 대산(또는 성주산)을 사이에 두고 시흥시와 인접해있다. 지금은 서로 다른 행정구역에 속해있지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일제강점기에는 시흥시의 일부가 부천군에 속해있었다.

시흥시의 신천동과 은행동 그리고 대야동 등은 부천군 소래면(蘇萊面)에 속해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다. 이들 지역이 부천과 가까웠다는 것을 알려주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소신(素新)'이다. '소신'은 소사(素砂)와 신천리(新川里)를 줄인 말로, 소사와 신천리를 왕래했던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소신자동차부였다.

 부천군 군세일반(富川郡 郡勢一班) 1929년(소화4년) 발행된 <부천군 군세일반>으로 부천의 행정구역, 인구, 산업, 교육, 농업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부천군 소래면은 현재의 시흥의 신천동, 대야동, 은행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부천 소사와 소래면은 왕래가 많았다.
▲ 부천군 군세일반(富川郡 郡勢一班) 1929년(소화4년) 발행된 <부천군 군세일반>으로 부천의 행정구역, 인구, 산업, 교육, 농업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부천군 소래면은 현재의 시흥의 신천동, 대야동, 은행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부천 소사와 소래면은 왕래가 많았다. 종로도서관

그렇다면 소신자동차부는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발전했고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소신자동차부에 대해 알아보고자한다.

소신자동차부의 설립과 초기 운행

소신자동차부의 정확한 설립연도를 알기는 쉽지 않다. 현재 대략적으로 설립연도를 알려주는 자료가 2개 있다. 하나는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1933년판, 동아경제신문사)이며, 다른 하나는 <동아일보> 기사이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 의하면 소신자동차부는 1931년 11월 01일 자본금 6500원으로 경기도 부천군 신천리 308에서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있으며 이 때 대표자는 최윤옥(崔允玉)이었다.

하지만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소신자동차부의 설립은 그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31년 6월 12일 동아일보 기사로 보면 군포장과 반월장의 승합차 개통 소식을 알리며 사장을 신현순(申鉉舜)으로 소개하고 있다. 신현순(1895~1969)은 경기도 시흥시 도리재길 23-10[금이동 462] 출신으로 디지털시흥문화대전에 의하면 '시흥시 최초의 운수업자'로 소개하고 있다.


신현순은 근대 문물에 일찍이 눈길을 돌려 1928년 포드 8인승 1대를 구입한 데 이어 1930년 10인승 2대의 차량으로 부천군 계남면 소사리[지금의 부천시 소사동]에 합자회사인 소신자동차부(素新自動車部)를 설립하였다. 소신자동차부에서는 소사역전[지금의 부천역]과 부천군 소래면 신천리[지금의 시흥시 신천동] 구간을 운행하였다. 소신이란 명칭은 최초 구간인 소사와 신천리의 앞 글자를 따서 명명하였다.

또한 1930년 11월 6일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안양과 안산 사이의 자동차 개통을 소개하며 '재래의 소사 신천간만 운전하던 선로를 연장하야'라며 그 이전에 소사자동차부의 노선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즉, 1930년 11월 1일 이전에도 소사와 신천리 사이에 자동차가 다녔으며 그 이후에는 노선을 연장하여 안양과 안산간(安養安山間)에 자동차운행이 확장운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신자동차부의 노선 확장


소신자동차부는 1931년 이후 지속적으로 자동차 노선을 확장한다. 1931년 5월에는 군포역전과 반월장간의 노선을 새로 확장하였으며, 운행 회수는 매일 3회로 운임비는 처음에는 40전하다가 30전으로 인하했다.

1933년 12월 20일에는 안양-군자간 자동차 개통하여 매일 왕복 8회 운행하였다. 1936년 3월 8일 <조선총독부관보>에 의하면 소래면 신천리 308번지와 소래면 포리 1번지의 약 3KM넘는 거리의 노선을 확장했다. 1936년 이전까지 보면 소신자동차부 입장에서는 소사에서 출발하여 신천리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안양, 안산, 수원, 시흥 등으로 노선을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1938년에는 소사에서 오정면으로 노선을 확장한다. 이전과 다르게 북쪽으로 진출한 것으로 현재의 부천시 교통을 형성했다. 2월 8일 자 <조선총독부관보>에 의하면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546번지에서 오정면 원종리 246번지까지 운행할 수 있는 면허허가를 받았다. 이 두 지점은 약 6KM로 편도 요금이 30전이었다. 1938년 2월 25일 개통되어 소사에서는 오전 8시 25분, 오후 12시 45, 오후 5시에 출발하였으며 오정에서는 오전 8시 55분, 오후 1시 15분, 오후 5시 30분 출발했다. 1939년에는 기존에 오정면 원종리까지 운행하였던 노선이 연장되어 김포군 양서면 방화리까지 운행하기 시작했다. 소사에서 오정까지는 운임이 30전이며, 방화리까지는 60전이었다.

1939년 사장 변경과 친일광고

1939년 8월 10일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소사자동차부의 사장이 한흥옥(韓興玉)으로 바뀌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강제동원과 함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친일광고를 많이 했다. 친일광고에는 지역유력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는데 소사자동차부도 동참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40년 1월 5일 매일신보에 <축 흥아신춘, 경인선사역전 소신자동차부 대표자 한흥옥(韓興玉)>, 1941년 1월 1일 조선신문에 <해국일본만세, 경인선 소사역전 합자회사 소신자동차부 대표자 서원흥옥 구명 한흥옥(韓興玉) 전화소사20번>, 1942년 1월 6일 조선신문에 <격멸 미영 웅비 일본의 신춘, 경인선 소사역전 합자회사 소신자동차부 대표자 서원흥옥(西原興玉) 전화20번> 친일광고를 했다. 1940년에 창씨개명이 본격화되며 한흥옥은 서원흥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격멸 미영 웅비 일본의 신춘>의 1942년 1월 6일 조선신문 광고 한흥옥은 서원흥옥(西原興玉)을 창씨개명한 후 경인선 소사역전 합자회사 소신자동차부 대표자(전화20번)로 광고를 하였다
▲ <격멸 미영 웅비 일본의 신춘>의 1942년 1월 6일 조선신문 광고 한흥옥은 서원흥옥(西原興玉)을 창씨개명한 후 경인선 소사역전 합자회사 소신자동차부 대표자(전화20번)로 광고를 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소신자동차부를 통해 일제강점기 부천의 교통 노선의 발전 과정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지역유지였던 사장의 친일광고 참여를 확인할 수 있다. '소신'이라는 단어에 우리의 가슴아픈 역사가 녹아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소신자동차부 #소사 #신천리 #한흥옥 #서원흥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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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역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약사로서 한약 처방, 야생화, 한약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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