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도산서원도 조선 영조 때 문인화가 강세황이 그린 도산서원도. 그림 오른쪽 강 속에 검게 보이는 것이 '반타석'이다. 그림 중간에 강을 가로지르는 점선은 '어량'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눈썰미가 있는 관광객은 옥진각 입구 벽에 붙어있는 사진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묻는다. 관광객이 본 그림은 강세황의 '도산서원도'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이 그림은 조선 영조 때 문인화가 강세황 선생이 도산서원을 그린 것으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 그림은 1751년에 그렸다고 합니다.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낙동강 안에 탁영담(濯纓潭), 반타석(盤陀石) 등이 있고 왼쪽에는 분천서원, 애일당, 분강촌 등 서원과 주변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천서원과 애일당, 분강촌 등은 안동댐이 생기면서 다른 곳으로 이전했습니다.
질문하신 바위는 '반타석'이라는 바위이고요. 배가 떠 있는 곳 옆이 '탁영담'입니다. 낙동강이자 안동댐 상류에 해당합니다. 도산서원 그림을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지금은 이 반타석과 탁영담을 보기 힘듭니다. 이 그림으로 봐서 예전에는 이곳에도 강물이 많았을 것으로 보여요. 1976년 댐이 생기면서 상류에서 내려온 모래가 도산서원 앞에 쌓이면서 '반타석' 바위와 '탁영담'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모래를 어느 정도 파내면 아마 '반타석'이 보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강을 가로질러 그려진 점선은 '어량(魚梁)'이다. 물고기를 잡는 장치로 물살을 가로막은 뒤 한 군데만 터놓고 거기에 통발 등을 놓아 고기를 잡는다. 이 어량은 조선 시대 백성들이 물놀이하며 물고기를 잡았던 곳일까?
'퇴계 선생 언행록' 속 어량
필자는 이달부터 도산서원 해설사로 근무한다. 도산서원에 대해 해설하는 중간중간에 관광객들은 여러 가지를 질문하며 궁금해한다. 그런데 해설사가 모르는 것을 골라서 질문하는 경향이 있다. 대답이 막힐 때가 많기 때문이다.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처럼 퇴계 선생의 언행을 제자들이 기록한 책이 있다. <퇴계 선생 언행록>이 그것으로 '어량'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도산정사 아래에 어량이 있다. 관에서 심히 엄하게 금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사사로이 고기를 잡을 수 없다. 선생께서 매 음력 유월이 되면 시내가 집에 거하신다. 일찍이 한 번도 이에 다다르지 않았다." - <퇴계 선생 언행록> 처향편
퇴계 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기록이다. 어량은 물고기를 잡는 장치인데 사람들은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관에서 설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량에서 잡힌 고기는 관청에서 거두어간다. 백성들은 고기를 잡는 부역에 임할 뿐 잡은 고기를 집에 갖고 갈 수 없다. 당시 강에서 잡힌 물고기도 백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저 반타석에서 놀았습니다. 여름철 멱을 감을 때 반타석까지 헤엄쳐 간 다음 바위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그야말로 당시 아이들의 '워터 파크'였지요. 지금은 모래에 묻혀 전혀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합니다."
도산서원 이동구 전 별유사의 말이다. 퇴계 후손으로 올해 76세인 이 전 별유사는 장난꾸러기 시절인 어릴 때 서원 주변 마을에서 살았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낙동강에서 물놀이하며 '반타석'에 올라 장난쳤고, 겨울이면 얼음을 지치다가 '반타석'에서 친구들과 쉬었다고 회고하면서 반타석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 도산서원 이동구 전 별유사가 예전 '반타석'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반타석은 모래더미에 묻혀있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이호영
퇴계 선생도 '반타석'에서 놀았다. '반타석'은 세평 남짓한 면적의 평평한 바위로 낙동강 중간에 놓여있다. 선생께선 이곳에 배를 대고 달빛을 벗 삼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퇴계 제자 이덕홍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유년 1561년 음력 4월 16일에 선생은 조카 교와 손자 안도 그리고 제자 이덕홍을 데리고 탁영담 달빛에 배를 띄우고 거슬러 올라가 반타석에 정박했으며 술이 세 순배 돌자, 선생께서 전적벽부를 읊었다. 그리고 '청풍명월'에서 명(明)자를 떼어 시를 지었다." - <퇴계 선생 언행록> 요산수편
퇴계 선생께서 '반타석'에서 한 물놀이는 달빛을 벗 삼아 술 한잔 기울이고 시를 짓는 것이었다. 선생의 풍류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선생과 제자들이 자연 즐기며 사색하던 곳
퇴계 제자 정사성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술년(1562년) 가을, 선생께서 도산에 계셨다. 달 밝은 밤에 사성을 불러 천연대(天淵臺)에 올랐다. 무이구곡 시를 외울 것을 명하셨다. 이에 따라 한 구절의 시를 지으셨다.
'깊은 밤 신선과 꿈속에서 놀다 스스로 돌아와 일어나
은밀히 벗을 불러 강대에 오르니
뜻이 있는 맑은 바람이 소매 속을 영접하듯 품고 있네
밝은 달빛이 다정하여 술잔을 돌려주네' - <퇴계 선생 언행록> 요산수편
선생이 풍류를 즐기던 '천연대'는 지금도 시사단을 바라보는 전망대로 남아있다. '천연대' 반대쪽에는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가 있다. 이곳은 선생께서 즐겨 찾았고 제자들도 홀로 혹은 선생과 함께 자연을 즐기며 사색하던 공간이다. 하지만 '탁영담'과 '반타석'은 지금 찾을 길이 없다. 강모래를 파내면 볼 수 있다지만 이 바위를 찾아도 문제다. 상류에서 모래가 계속 유입되면 다시 묻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타석'을 찾아 보존하기 위해 서원 상류에 보를 만들 수도 없다. 도산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서원 주변의 형상을 변경하기도 힘들지 않을까 싶다. 결국 이젠 이래저래 추억 속에 남을 뿐이다.

▲ 도산서원 시사단. 1792년 정조 때 도산에서 별도로 과거시험(도산별시)이 치뤄졌다. 시사단에서 상류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반타석'이 있었다.
이호영
퇴계 선생은 '반타석'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黃濁滔滔便隱形(황탁도도편은형) 누런 물결 도도하면 형체를 숨기고
安流帖帖始分明(안류첩첩시분명) 잔잔하게 흐르면 분명히 드러나네
可憐如許奔衝裏(가련여허분충리) 가련타, 찌를 듯 달려가는 물결에도
千古盤陀不轉傾(천고반타부전경) 오랜 세월 반타석은 기울지 아니하네
그때도 비가 많이 와서 흙탕 물결이 도도하게 흐르면 '반타석'은 보이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선생께서 오랜 세월 지나도록 기울지 않았다고 한 반타석은 선생의 노래와 달리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선생께서 이 사실을 알면 매우 아쉬워하지 않을까 싶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待人春風 持己秋霜(대인춘풍 지기추상)을 좋아합니다.
공유하기
"도산서원 앞에 점선처럼 긴 줄이... 이건 뭔가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