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7.27 13:11수정 2026.08.06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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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결혼하고 집을 떠난 지 2년이 넘었다. 아들의 흔적은 집안 구석구석에 멈춰 선 시간처럼 남아 있다. 장롱 속 일부 옷가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지하 창고에는 예비용 자동차 타이어까지 아직도 보관 중이다.
오늘은 갑자기 책장 한쪽에 가득 쌓인 책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전부가 아들이 남기고 간 책들이다. 이제는 정말 먼지만 앉은 이 책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책장 앞에 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책장 맨 밑 칸에 빼곡히 자리 잡은, 오색찬란한 학습만화들이었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동굴에서 살아남기>, <공룡 세계에서 살아남기>... 제목만 봐도 저 책들을 사러 분주히 서점을 오고 갔던 시간들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책장에는 '살아남기 시리즈' 수십 권이 꽂혀 있었다.
시리즈 책들을 보는 순간, 2007년 그 시절이 어제 일처럼 아련히 겹쳤다. 작은애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아내와 두 아들은 캐나다로 떠났고 나는 한국에 홀로 남아 8년간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다. 그때는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휴가 날이 곧 '책 배달' 하는 날이었다. 작은아들은 아빠가 오는 것보다 아빠 가방 속에 담길 '살아남기 시리즈'를 더 기다리는 눈치였다.

▲ 아들의 책장에 여전히 빼곡하게 꽂혀 있는 '살아남기 시리즈'와 학습만화들
김종섭
당시 한국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시리즈'는 엄청난 인기였다. 캐나다에 있던 작은아들 역시 한국 아이들과 똑같이 이 책에 열광했고, 한국에서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아빠 가방에 실려 오는 신간을 남들보다 먼저 손에 쥐는 것은 아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뿌듯함이었던 것 같다.
아들이 혹시나 나중에라도 이 책들을 찾지 않을까 싶어, 그동안은 책장의 책들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었다. 책 한 권마다 애틋했던 그 시절의 온기가 그대로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을 잃고 먼지만 쌓여가는 책들을 언제까지나 둘 수만은 없어, 이참에 정리해 보기로 했다.
책장을 정리하려고 할 때 아내가 한사코 말렸다.
"작은애한테는 얼마나 소중했던 추억인데... 그리고 분명히 이 책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특별한 거니까 그냥 두는 것이 좋겠어요."
아내의 말에 책장 구석구석을 다시 가만히 훑어보았다. 학습만화들 위로는 대부분이 영문 서적들이었다. 캐나다 현지 학교를 다니며 겪었을 낯선 언어와의 씨름, 그 속에서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준 이 책장 한 칸의 '살아남기 시리즈'가 곧 아들의 어린 시절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타국에서 영어가 아닌 한글 활자를 그리워했을 그 마음을 생각하니, 책들이 품고 있는 흔적들을 감히 쓰레기통으로 던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만히 내 속을 들여다보니, 단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이 책마저 버리는 순간, 아들을 위해 한국을 오갈 때마다 사 들고 왔던 그 애틋했던 시절마저 영영 지워버리는 것만 같아 아비인 내가 차마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다. 굳이 무거운 종이 뭉치를 들지 않아도 정보와 감동을 쉽게 얻는 요즘, 책과 종이 신문이 서서히 소명을 다해가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하지만 집 책장에 남아 있는 '살아남기 시리즈'의 무게는 전혀 달랐다. 그 책에는 기러기 아빠의 미안함이 짙게 담겨 있었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멀리 떨어진 아들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기도 했다. 결국 책장의 책들을 비우려 했던 마음을 접고, 먼지만 털어낸 채 '살아남기 시리즈'를 다시 책장 속 제자리에 남겨두기로 했다. 언젠가 아들이 이 추억을 스스로 챙겨 들어가든지, 아니면 내가 이 소중한 추억을 안고 갈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그저 이 자리에 가만히 두기로 했다.
아내는 앞으로는 꼭 필요한 것만 사고 집안에 오랜 시간 머물렀던 불필요한 것은 줄이는 습관을 갖자고 한다. 하지만 이 책장 한 칸 만큼은 아내도 예외로 두고 싶었던 것 같다.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책장 속의 책들은 우리 가족이 겪어낸 '기러기 시절'이라는 긴 터널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썼던 우리 가족의 뜨거웠던 유물이 보관된 곳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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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거주, 이민자의 삶과 일상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를 기록,다음'브런치'활동도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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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아빠였던 내가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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