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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책이 나왔습니다] 13년차 역사 교사가 쓴 <이불킥 한국사>… 실패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것

등록 2026.08.02 11:52수정 2026.08.0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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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 혹은 편집자도 시민기자로 가입만 하면 누구나 출간 후기를 쓸 수 있습니다.[편집자말]

고등학교에서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다루던 수업이었습니다. 그 시절 왜 전국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는지, 나라가 세금을 걷는 방식이 어디서부터 무너졌는지를 이야기하던 참이었습니다. 삼정의 문란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몫의 군포(軍布, 조선시대에 군역 대신 내던 베)까지 남은 가족이 떠안아야 했다는 대목에서, 평소 말수가 적던 아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진짜 그랬어요?" 진짜였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그럼 그 집은 어떻게 살았어요?", "왜 아무도 안 막았어요?"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참 반가운 질문이었습니다. 시험에 어떻게 나오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 낸 사람들이 궁금해서 나온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13년째 역사를 가르치면서 확인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들이 역사를 남의 일이 아니라 제 일로 받아들이는 순간은 자랑스러운 장면 앞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되묻게 되는 장면, 부끄러워서 오히려 눈을 떼지 못하는 장면 앞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스스로 묻기 시작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저는 그 물음이야말로 역사 수업이 끝내 닿아야 할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쳐 왔고, 2022 개정 교육과정 중학교 역사 교과서(천재교과서)의 대표 저자로 집필에도 참여했습니다. 교과서를 쓰는 일은 문장 하나, 서술어 하나를 놓고 몇 시간씩 회의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취기준과 분량, 균형과 신중함이 모든 문장을 붙듭니다. 배운 것이 참 많았지만, 원고를 넘기고 나서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뜻밖에도 끝내 싣지 못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실패한 순서대로 읽는 2000년

이불킥 한국사 표지 역사도 이불킥을 한다는 것을 웃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27개의 장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불킥 한국사 표지 역사도 이불킥을 한다는 것을 웃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27개의 장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브리드북스 출판사

교과서에도 아픈 역사는 분명히 들어갑니다. 다만 정해진 지면 안에서 무엇을 남길지 고르다 보면 위기를 넘긴 이야기, 나라를 지켜 낸 이야기, 끝내 목표를 이룬 이야기가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교실에서 아이들의 눈이 반짝이던 순간은 늘 그 반대쪽에 있었습니다.

교과서가 다 담지 못한 자리에 오히려 아이들을 붙드는 힘이 있구나. 그 생각이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지난 13일 펴낸 <이불킥 한국사>(브리드북스)입니다. 신라의 골품제에서 시작해 2024년 12월의 비상계엄에서 끝나는, 2000년이 넘는 시간 가운데 지금 다시 봐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장면만 스물일곱 개를 골라 담은 역사책입니다.


책은 신라가 세워진 기원전 57년에서 2024년 12월에 이르는 시간을 다섯 개의 부와 스물일곱 개의 장으로 나눴습니다. 연표를 따라가는 대신 실패의 성격이 달라지는 순서로 배열했습니다. 안에서 갈라지던 시대에서 백성을 쥐어짜던 시대로,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시대에서 해방 뒤에도 아물지 못한 상처의 시대로, 그리고 시민이 그 상처를 스스로 수습해 온 시대로 이어집니다.

1부에는 천 년 왕국의 발목을 잡은 골품제가, 2부에는 임금과 신하가 남한산성 안에서 47일을 버티는 동안 성 밖의 백성은 죽거나 청으로 끌려간 병자호란이 놓입니다. 3부에서는 전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떠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6형제와, 우승하고도 고개를 들지 못한 1936년 베를린의 손기정을 만납니다.


4부는 해방 정국을 뒤흔든 오보 한 줄과 제주 4·3 사건, 피란민이 건너던 한강 인도교가 끊긴 새벽, 끝내 좌초된 친일 청산을 짚습니다. 5부는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에서 출발합니다.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의 죽음, 헌법을 뜯어고친 유신, 광주의 5월, 스물한 살 대학생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진 남영동, 그리고 외환위기를 지나 2024년 12월 3일 국회 유리창이 깨지던 밤에 닿습니다.

각 장 끝에는 비슷한 실패를 겪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한 편씩 붙였습니다. 우리 역사만 유독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렇다면 어떤 나라는 어떻게 매듭을 지었는지, 우리는 왜 아직 그러지 못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생각은 하나입니다. 우리 역사를 앞으로 밀고 온 힘은 완벽한 승리가 아니라 뼈아픈 실패였다는 것입니다. 3·15 부정선거는 우리 선거사에서 가장 낯 뜨거운 장면이지만, 그 낯 뜨거움이 4·19 혁명을 불러왔습니다. 스물두 살 전태일이 "법대로만 해 달라"며 자기 몸에 불을 붙여야 했던 것은 사회의 명백한 실패였지만, 그 죽음 이후 한국의 노동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들어섰습니다.

헌법을 고쳐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길을 연 유신의 7년은 헌정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지만, 긴급조치에 맞선 학생들과 해직당하면서도 펜을 놓지 않은 기자들이 그 어둠 속에서 오늘 우리가 쥔 헌법을 지켜 냈습니다.

책상을 한 번 쳤을 뿐인데 갑자기 숨졌다던 1987년의 그 발표, 그 뻔뻔한 거짓말은 결국 6월 민주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랫동안 입을 다물어야 했던 노근리 사건과 제주 4·3 사건도 뒤늦게나마 진상 규명과 특별법으로 이어졌습니다. 실패는 그 자체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갈림길은 언제나 실패한 다음에 무엇을 했느냐에 있었습니다. 배운 것이 있었기에 다음 걸음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삶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라톤 풀코스를 뛰면서 그것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초반에 욕심을 내다 20km 지점에서 주저앉아 본 사람만이 자기 페이스를 압니다. 여섯 시간이 넘는 초라한 기록이었지만, 그 하루가 저에게 포기하지 않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같은 것을 배웁니다. 잘 해낸 날보다 서툴렀던 날이 저를 더 자라게 했습니다. 역사가 실패를 딛고 나아온 방식은 곧 사람이 어른이 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마라톤 풀코스 메달 20km에서 쓰러지고 6시간이 넘는 부끄러운 기록이지만 마라톤을 통해 포기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마라톤 풀코스 메달 20km에서 쓰러지고 6시간이 넘는 부끄러운 기록이지만 마라톤을 통해 포기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이종관

"역사를 왜 배워야 하나요?" 물으면

이 책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자란 책입니다. 저는 2016년부터 수업 방식을 바꿨습니다. 강의로 진도를 나가는 대신, 학생들이 먼저 수업 영상을 보고 교실에서는 토론하고 판단하게 하는 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역사동아리 학생들과 제주 4·3 사건과 5·18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캠페인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 교실에서, 그리고 전국의 교사와 학생을 만나는 강연장에서 저는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받았습니다. "역사를 왜 배워야 하나요?"

솔직히 오래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판단이 필요한 순간에 꺼내 볼 사례를 줍니다. 그 사례가 많을수록 우리는 덜 속고, 덜 휩쓸리고, 조금 더 오래 버팁니다.

그래서 저는 '역사를 잘 안다'는 말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건과 인물과 연도를 정확히 외우는 것이 기준이라면, 그 지식은 시험이 끝나는 순간 대부분 사라집니다. 어른이 되어 실제로 남는 것은 연표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낯선 주장을 만났을 때 근거를 먼저 따져 보는 습관, 책임을 묻는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마음, 모두가 옳다고 말할 때 한 번 더 멈춰 서는 감각. 그런 것들이야말로 역사 수업이 남겨야 할 몫이라고 믿습니다.

세부적인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연도와 사건과 인물을 외우려고 드는 순간 역사는 어려워집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역사가 우리 사회에, 그리고 내 삶에 어떤 물음을 남기는가입니다. 골품제를 읽고 "나는 지금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나누고 있나"를 물을 수 있다면, 병자호란을 읽고 "내가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다면 성문 밖 사람들을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수업은 성공한 것입니다.

제가 오래 교육 철학으로 삼아 온 말은 '사람·사랑·삶'입니다. 역사도 결국 사람의 이야기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며, 오늘의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지식을 채워 주기보다 물음을 남기는 쪽이기를 바랐습니다. "나라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 했을까." 이 물음 하나를 붙들 수 있다면, 우리는 역사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역사로 오늘을 판단하는 쪽으로 한 걸음 옮겨 갈 수 있습니다.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제가 바라는 것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책을 덮은 뒤 이불을 걷어차는 대신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를 한 번쯤 되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분명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불편을 견딘 사회만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고, 그 불편을 견딘 사람만이 조금 더 단단해졌습니다. 우리가 통과해 온 실패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스물일곱 번의 이불킥이 끝내 하나의 물음으로 남는다면, 저는 이 책이 제 몫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불킥 한국사 - 우리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

이종관 (지은이),
브리드북스, 2026


#이불킥한국사 #신간도서 #한국사 #역사교사 #브리드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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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역사를 가르치고, 집에서는 8살 딸 지수와 6살 아들 지호에게 인생을 배우는 아빠. 첫째 출산 후 육아휴직을 하고 블로그에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아이를 키우면서 사람과 세상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며 가장 자연스러운 나를 만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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