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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얼음물 조언'이 필요할 때 읽어보세요

[리뷰] 정세랑의 <당신의 독자가 될게요>

등록 2026.07.29 16:43수정 2026.07.2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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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째 미완의 상태로 머무는 숙제 같은 글이 하나 있다. 내가 가진 사소한 습관과 신발에 관한 이야기다. '신발 사유'라는 가제로 바탕화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파일을 만든 날짜는 5월 9일. 틈이 날 때마다 몇 문장을 쓰고 덮기를 반복했다. 학생들 수학여행 다녀오고 마무리하자. 6월 각종 행사가 끝나면 쓰자. 방학하면 더 살을 붙이자.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석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사실 글을 더 쓰지 못했던 명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글을 쓰다 보면 '질문 요괴'는 발소리를 쿵쾅거리며 어김없이 내게 다가와 묻는다.

'솔직히 이 글, 다른 사람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겠어?'


그 질문이 왈칵 쏟아지는 날에는 초고를 쓰다 몇 번이나 첫 문장을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파일을 덮곤 했다. 이번에도 꼭 그랬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상을 타인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펼쳐내는 일이 어려웠다. 내 글이 원래 이랬나? 지독한 의심병은 지나간 글들을 다시 찾아 뒤적이게 만들었다. 내 마음속 질문요괴는 질문의 수위를 점점 높여 갔다.

글을 쓸 때 찾아오는 무시무시한 물음들

'그래서 어쩌라고?'
'아는 단어가 이것밖에 없어? 어휘력이 어쩜 발전이 없니?'
'또 결말이 이렇게 간다고? 이건 뻔한 클리셰잖아!'

글을 쓰다 보면 문장보다 앞서는 이런 무시무시한 물음에 발목이 잡힐 때가 있다. 사유를 뻗고 또 뻗다가 방향을 잃을 때면 마치 자기가 만들어 놓은 구멍 뚫린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길 잃은 거미 신세가 된 것 같았다. 쓰고 싶은 글도, 생각도 많은데 좀처럼 써지지 않는 날에는 창작자의 고통 그 비슷한 것이 몰려오곤 했다. 어설픈 내 초고가 예뻐 보일 리 없었다. 무얼 그리 글을 많이 썼다고. 그 생각 끝에 우습지만 이런 안도감이 찾아왔다.

'휴… 내가 생업이 작가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꼭 그렇게 글쓰기가 막히는 날에는 어쩐지 내 생업이 더 빛나고 찬란해 보이기까지 했다. 늘 학교 밖 라이프를 동경했던 내가 생업을 더 밀착해서 사랑하게 되었으니 제법 가성비 괜찮은 괴로움이기도 하다. 너무 애쓰지 말자. 가볍게 써 보자. 그러다가도 나 혼자만의 외로운 아우성이 아니라 누군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재미없고 진지하기만 한 글이 아니라 숨 구멍이 숭숭 뚫린, 바람 잘 통하는 마무리까지 바라게 된다. 참, 욕심도 풍년이다.

그런 내게 정세랑 작가의 문장이 들어왔다.


"어떻게 고칠 것인가. 우리보다 앞서 살아가고 써나간 수많은 작가들이 갖가지 표현으로 토로한 것처럼 세상에 아름다운 초고는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초고는 엉성하고, 진부하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짧아야 할 데는 길고, 길어야 할 데는 짧다. 쓰려고 했던 핵심이 어이없을 정도로 형성되지 않았거나 읽는 이를 이야기로 빠져들게 할 통로가 심히 부실할 수도 있다. (중략) 초고를 그 상태 그대로 사랑하는 작가를 나는 여지껏 만나보지 못했다. 초고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초고에 자신만만하다면 오히려 그 작가를 살짝 의심해 볼지도 모르겠다."

올해 여름에 나온 정세랑 작가의 산문집 <당신의 독자가 될게요>(2026년 6월 출간)를 읽었다. 독자들이 애정하는 정세랑 작가도 초고 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다니. 이 과정은 쓰는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싶어 어쩐지 마음이 놓이기까지 했다. '너만 그래'가 아니라 '나도 사실은 그래'. 그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창작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겪어 본 사람은 안다.

 책표지
책표지 마음산책

글은 마음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구나

책에서 소개된 또 다른 이야기도 오래 마음에 남았다.

"얼마나 잘 잤는지, 햇빛은 충분히 쬐었는지, 운동은 했는지에 따라 그날그날 쓰는 글의 양과 질이 직접적으로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내면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사실 몸과 분리할 수 없는 형태라는 것을 몇 년 전 겨울 독감에 걸렸을 때 체감한 적도 있다. 해열제로 잘 잡히지 않은 미열이 일주일 정도 지속되었을 뿐인데 한 자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정세랑 작가의 글을 읽으며 새삼 생각했다. 글은 마음만으로 쓰는 것이 아니구나. 마음이 풍성해지고 반짝이는 생각이 찾아오는 날만 기다린다고 글이 저절로 써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야 할 시간에 자고, 볕 좋은 날에는 잠시 밖으로 나가 햇빛을 쬐고, 몸을 움직이고, 내 몫의 하루를 살아내는 일. 어쩌면 문장을 쓰는 일은 그런 평범한 생활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흐트러진 일상을 거창하게 뜯어 고치라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잘 자고, 잘 먹고, 움직이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 일. 정세랑 작가의 이야기는 마치 동생을 아끼는 언니가 슬쩍 건네는 조언처럼 따뜻하게 다가왔다. 글을 쓰며 한 번 쯤 고민했을 물음들, 작가가 겪었던 시행착오들은 어쩌면 글쓰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얼음물 한 잔처럼 명쾌하게 닿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고 노트북을 켰다. 바탕화면 한구석에 석 달째 눌러앉아 있는 파일 하나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파일을 열었다. 쓰다 만 문장들이 갈 길을 잃은 채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여전히 나는 가치와 무가치 사이 어딘가에 서서 이 글을 쓸지 말지를 두고 망설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예전보다는 내 글을 어여쁘게 바라보고 내가 쓴 문장들을 믿어 보고 싶다. 글이 만들어 가는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와 sns에도 실립니다.

당신의 독자가 될게요 - 혼란을 끌어안는 쓰기에 대하여

정세랑 (지은이),
마음산책, 2026


#당신의독자가될게요 #정세랑지은이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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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주부이자 선생님, 글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 어둠 속에서도 가장 찬란한 빛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한 생의 주인공. 다정한 이웃들과 동행하는 반딧불 라이프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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