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북 <풍설야귀인도 > 종이에 연한색 66.3*42.9 cm 최북미술관 소장
최북미술관
'붓(毫)으로 먹고산다(生)'며 스스로 호생관이라 칭했던 최북. 옛 문헌들이 전하는 그의 생애는 얼음처럼 차갑기보다 오히려 통제할 수 없는 불덩이에 가깝습니다. 산수화를 부탁 받고 산만 덩그러니 그려준 뒤 물이 없다고 따지는 선비에게 "그림 밖이 다 물이다!"라고 호통을 치거나, 나라에 금주령이 떨어지자 일면식 없는 남의 초상집에 들어가 목 놓아 곡(哭)을 해주고 술을 얻어 마셨다는 웃지 못할 기행들은 그저 애교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그림 솜씨를 능멸하는 권세가 앞에서는 "네까짓 놈에게 그림을 그려주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 게 낫다"며 망설임 없이 송곳으로 제 오른쪽 눈을 찔러버렸습니다. 험한 세상을 향해 굴욕 대신 고통을, 타협 대신 광기를 선택했던 화가. 그날 이후 한쪽에만 알이 있는 반 안경을 낀 채 평생을 외줄 타듯 살았던 그 사내는, 얄궂게도 그림을 팔아 번 돈으로 취하도록 술을 마신 뒤 차가운 눈구덩이에 빠져 생을 마감했습니다.
올여름 맛 본 가장 서늘한 납량특집
칠흑 같은 어둠과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묵묵히 걸어가는 저 그림 속 나그네가 어쩌면 최북 자신의 예견된 자화상은 아니었을까요. 평생 붓 끝으로 서늘한 눈을 흩뿌리며 미친 듯이 타오르던 예술가가, 결국 자신이 그토록 매섭게 그리던 차가운 눈밭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비극적 서사는 찻잔을 쥔 손끝마저 얼어붙게 만듭니다.
2시간 동안 단단한 얼음이 제 몸을 녹여 차의 진액을 뽑아낸 인내의 시간은 22초의 찰나로 응축 됐고, 불꽃처럼 살았던 천재 화가의 생애는 차가운 눈밭에서 영원히 얼어붙었습니다.
남은 삼림계 우롱을 마저 삼켜봅니다. 묵직한 초록의 감칠맛과 쌉쌀한 단맛이 여전히 맴돌고, 상쾌한 회감은 숲의 바람처럼 목덜미를 스치네요. 그림 속 최북이 그린 눈보라의 여운이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서늘한 기운으로 제 주변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
비구름이 걷히고 폭염이 꿰찬 이 여름날, 기이했던 화가의 처연한 눈보라를 병풍 삼아 들이킨 코오리다시 한 잔은 올여름 제가 맛본 가장 서늘하고도 묵직한 '납량특집'이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내 배낭 속의 영국 남자』, 『언제라도 티타임』, 『화요일의 티타임』의 저자. 세상 구경하고 차 마시며 글, 사진, 영상, 그림으로 삶을 기록합니다. 아직은 벌이가 시원찮은 유튜버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는 진심입니다. 좋은 기획과 재미있는 작업 제안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 비즈니스(출간·강의·글작업) 문의: peanutsholic@naver.com
공유하기
'얼음차' 마시며 본 그림 한 점, 뼈가 다 시립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