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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차' 마시며 본 그림 한 점, 뼈가 다 시립니다

폭염 쏟아지는 날, 얼음으로 우린 우롱차 마시며 본 천재 화가 최북의 겨울 그림

등록 2026.07.31 11:56수정 2026.07.3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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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기자말]

 대만 우롱차 삼림계 6g을 넉넉히 바닥에 깔아주었다. 이 동글동글한 찻잎은 얼음이 녹으며 서서히 기지개를 켤 것이다.
대만 우롱차 삼림계 6g을 넉넉히 바닥에 깔아주었다. 이 동글동글한 찻잎은 얼음이 녹으며 서서히 기지개를 켤 것이다. 노시은

비구름이 한바탕 휩쓸고 가더니 그 자리를 무더위가 꿰찼습니다. 날이 이토록 뜨거워지니 차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얼음으로 찻잎을 우리는 '코오리다시(氷出し)'가 인기입니다.

얼음이 주변 열기를 빼앗아 천천히 녹으며 차의 성분을 뽑아내는 방식입니다. 열에 쫓기지 않고 찻잎의 가장 맑은 단물만 뽑아내는 느긋한 미학이랄까요. 폭염이 쏟아지는 날엔 이 고요하고 서늘한 기다림이 참 간절해집니다.


 산을 오르기 전 세팅한 '얼음차'
산을 오르기 전 세팅한 '얼음차' 노시은

뙤약볕 쏟아지는 산을 오르기 전에 '얼음차'를 세팅했습니다. 코오리다시(氷出し)는 원래 옥로나 센차 같은 일본 녹차로 즐기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러 동글동글 말린 삼림계 우롱을 골랐습니다. 얼음이 천천히 녹는 동안 작은 구슬 같던 찻잎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연둣빛 물이 찰랑찰랑

바닥에 삼림계 우롱 찻잎을 깔고 투명하고 단단한 얼음을 수북하게 올려 저만의 작은 빙산을 만들었죠. 산행을 마치고 땀 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이 얼음이 다 녹아 제게 완벽한 위로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건 꽤 고된 일이었지만, 문득 나뭇잎 그늘 사이로 불어오는 짙고 푸른 숲의 향기는 산을 오르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압도적인 상쾌함이었습니다.

 그 많던 얼음이 다 녹고 차가 우러났다. 뜨거웠던 산행 후 마신 이 얼음차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그 많던 얼음이 다 녹고 차가 우러났다. 뜨거웠던 산행 후 마신 이 얼음차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노시은

집에 돌아와 보니 수북했던 얼음은 마법처럼 다 녹아 있었습니다. 찻잎이 원래 모습을 찾으며 내어준 맑은 연둣빛 수색이 찰랑거렸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어 보니, 가장 먼저 시원함이 반가웠습니다. 이어서 묵직한 초록의 감칠맛이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고 쌉쌀한 단맛이 빈자리를 채워줍니다.

목으로 넘기고 났을 때의 기분 좋은 회감(回甘)은 유난히 상쾌했어요. 차가운 얼음으로 아주 오랜 시간 진득하게 우려낸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산을 오르며 들이마셨던 시원한 숲의 향기가 찻잔 속에서 생생하게 오마주 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2시간 남짓 얼음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타임랩스로 찍어보니, 단 22초짜리 짧은 영상으로 압축되더군요. 얼음이 녹아내리며 찻잎을 적시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조선시대 선조들의 지혜로운 풍류가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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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전 세팅한 '얼음차'의 변화 2시간 남짓 얼음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타임랩스로 찍어보니, 단 22초짜리 짧은 영상으로 압축됐다. ⓒ 노시은


 찻잎 위로 나만의 빙산을 쌓아두고 주문을 왼다. "시원하고 맛있어져라....."
찻잎 위로 나만의 빙산을 쌓아두고 주문을 왼다. "시원하고 맛있어져라....." 노시은

붓 끝으로 평생 미친 듯이 타오른 예술가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던 시절, 선조들은 단오가 되면 지인들과 부채를 나누는 '단오선(端午扇)' 풍습을 즐겼죠. 부채 위에는 화사한 꽃이나 맑은 산수화 등 다양한 풍경을 담았지만, 때로는 눈 덮인 한겨울의 설경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부채질로 일어나는 물리적인 바람 위로, 뼛속까지 시린 눈보라 그림을 얹어 시각적인 한기를 극한으로 끌어냈던 참으로 풍류 넘치는 피서법이었습니다.

나도 하나 받을 수 있다면 뭐가 좋을까를 생각하다가 즉시 조선 제일의 광인(狂人) 천재 화가로 불리는 호생관(毫生館) 최북의 부채 그림, <설중귀려(雪中歸驢)>를 떠올렸습니다. 합죽선 부채꼴 화면에 눈 내린 첩첩산중과 눈길을 헤치며 집으로 향하는 나귀 탄 인물을 그린 작품입니다.

하얗게 얼어붙은 그 설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나에게도 이런 근사한 겨울 그림 부채가 하나 쯤 있으면 이 무더위를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아마 막상 내 손에 있었다면 귀하고 아까워서 부치기는커녕 펼치는 것도 망설였을 것 같더군요.

이 그림에 이어 떠올린 그림 한 점. 그의 또 다른 겨울 그림인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입니다.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나그네의 뒷모습. 조개껍데기를 빻아 만든 하얀 호분을 흩뿌려 그린 이 매서운 눈보라는 보기만 해도 살갗이 아립니다. 그림이 뿜어내는 한기가 유독 뼛속을 파고드는 이유는, 이 서늘한 화폭 뒤에 숨겨진 화가 최북의 펄펄 끓는 듯했던, 그래서 더 기구 했던 삶이 처연하게 겹치기 때문입니다.

 최북 <풍설야귀인도 > 종이에 연한색 66.3*42.9 cm 최북미술관 소장
최북 <풍설야귀인도 > 종이에 연한색 66.3*42.9 cm 최북미술관 소장 최북미술관

'붓(毫)으로 먹고산다(生)'며 스스로 호생관이라 칭했던 최북. 옛 문헌들이 전하는 그의 생애는 얼음처럼 차갑기보다 오히려 통제할 수 없는 불덩이에 가깝습니다. 산수화를 부탁 받고 산만 덩그러니 그려준 뒤 물이 없다고 따지는 선비에게 "그림 밖이 다 물이다!"라고 호통을 치거나, 나라에 금주령이 떨어지자 일면식 없는 남의 초상집에 들어가 목 놓아 곡(哭)을 해주고 술을 얻어 마셨다는 웃지 못할 기행들은 그저 애교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그림 솜씨를 능멸하는 권세가 앞에서는 "네까짓 놈에게 그림을 그려주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 게 낫다"며 망설임 없이 송곳으로 제 오른쪽 눈을 찔러버렸습니다. 험한 세상을 향해 굴욕 대신 고통을, 타협 대신 광기를 선택했던 화가. 그날 이후 한쪽에만 알이 있는 반 안경을 낀 채 평생을 외줄 타듯 살았던 그 사내는, 얄궂게도 그림을 팔아 번 돈으로 취하도록 술을 마신 뒤 차가운 눈구덩이에 빠져 생을 마감했습니다.

올여름 맛 본 가장 서늘한 납량특집

칠흑 같은 어둠과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묵묵히 걸어가는 저 그림 속 나그네가 어쩌면 최북 자신의 예견된 자화상은 아니었을까요. 평생 붓 끝으로 서늘한 눈을 흩뿌리며 미친 듯이 타오르던 예술가가, 결국 자신이 그토록 매섭게 그리던 차가운 눈밭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비극적 서사는 찻잔을 쥔 손끝마저 얼어붙게 만듭니다.

2시간 동안 단단한 얼음이 제 몸을 녹여 차의 진액을 뽑아낸 인내의 시간은 22초의 찰나로 응축 됐고, 불꽃처럼 살았던 천재 화가의 생애는 차가운 눈밭에서 영원히 얼어붙었습니다.

남은 삼림계 우롱을 마저 삼켜봅니다. 묵직한 초록의 감칠맛과 쌉쌀한 단맛이 여전히 맴돌고, 상쾌한 회감은 숲의 바람처럼 목덜미를 스치네요. 그림 속 최북이 그린 눈보라의 여운이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서늘한 기운으로 제 주변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

비구름이 걷히고 폭염이 꿰찬 이 여름날, 기이했던 화가의 처연한 눈보라를 병풍 삼아 들이킨 코오리다시 한 잔은 올여름 제가 맛본 가장 서늘하고도 묵직한 '납량특집'이었습니다.
#최북 #풍설야귀인도 #노시은작가 #코오리다시 #스누피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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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낭 속의 영국 남자』, 『언제라도 티타임』, 『화요일의 티타임』의 저자. 세상 구경하고 차 마시며 글, 사진, 영상, 그림으로 삶을 기록합니다. 아직은 벌이가 시원찮은 유튜버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는 진심입니다. 좋은 기획과 재미있는 작업 제안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 비즈니스(출간·강의·글작업) 문의: peanutshol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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