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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 어때? 서늘한 바람에 여름꽃이 지천

덕유산 설천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만난 다양한 꽃들

등록 2026.08.02 11:54수정 2026.08.0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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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정상석 산 이름과 해발고도가 새겨진 표지석 너머로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이 배경이 되었다.
▲덕유산 정상석 산 이름과 해발고도가 새겨진 표지석 너머로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이 배경이 되었다. 신극채

바람은 서늘했고 여름꽃은 만발했다. 7월 25일,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덕유산의 길 위는 아래 세상과 달랐다.

장맛비가 물러간 뒤 무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평지에선 풀과 나무도 더위를 피해 잠시 쉬어가는 듯 봄만큼 많은 꽃을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덕유산 능선은 특별했다. 사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에 간 것은 아니었다. 지난봄에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가 무릎이 아파 중도에 포기한 뒤에도 통증이 남아 있었다. 최근에는 아내와 삐걱거린 뒤 화해했지만 서먹함이 가시진 않았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 설천봉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좁은 곤돌라 안에서 느끼지 못했던 시원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설천봉을 타고 넘어가며 기온을 더 낮춘 듯했다. 구름에 가려 산 아래 풍경은 보이지 않았는데 오히려 세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 들어온 기분마저 들었다. 산행을 시작해 숲으로 들어서자 시원함을 넘어 서늘함이 느껴졌다.

고산지대에서 만나는 다양한 야생화

평지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야생화를 눈과 사진에 담느라 걸음이 느려졌다. 예전엔 이럴 때마다 뒤처진 나를 기다려주던 아내였다. 앞서가던 아내와 거리가 멀어졌다. 마침 나비 한 마리가 꽃에 날아왔는데도 내려앉는 순간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뒤쫓아 갔다. 아내는 멀리 가지 않고 전망이 트인 곳에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아내를 보자, 더 이상 어색함을 이어가지 않으려는 속내가 보였다.

덕유산의 여름꽃 <시계방향으로> 1. 말나리, 2. 동자꽃, 3. 참바위취, 4.도라지모시대
▲덕유산의 여름꽃 <시계방향으로> 1. 말나리, 2. 동자꽃, 3. 참바위취, 4.도라지모시대 신극채

서두르긴 했으나 마음이 풀리자 꽃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산행 내내 숲속을 밝힌 꽃은 말나리였다. 산에 오기 전에 본 식물도감에서 "줄기 끝에 1~8개의 꽃이 핀다"는 글을 본 터라 만나는 말나리마다 꽃송이 수를 세었다. 중봉에 이를 때까지 대부분 서너 개뿐이었다.

되돌아오는 길에 꽃송이가 많은 말나리를 만났다. 하나, 둘, 셋... 거짓말처럼 줄기 끝에 여덟 송이 꽃이 달려 있었다. 책에서 본 내용을 산길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름을 아는 것으로 식물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일이었다.


말나리꽃이 피었다면 근처에서 동자꽃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둘은 사는 장소와 꽃 피는 시기가 비슷하고 꽃 색깔도 닮았다. 식물학적으로는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내게는 함께 찾아보는 형제 같은 꽃이다. 믿음직한 형과 귀여운 동생이랄까.

말나리가 당당하고 굳세게 보인다면 동자꽃은 여리고 다정해 보인다. 말나리에서 '말'은 동물 말을 뜻하면서 여기서는 '크다'는 의미로 쓰인다. 동자꽃은 눈 속에서 스승을 기다리다 죽은 어린 동자승에 얽힌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름에 담긴 느낌도 서로 다르다.


산길 옆으로 도라지모시대도 피었다. 꽃잎은 종을 닮았고 길게 뻗은 암술은 마치 종 안쪽을 때려 울림을 만드는 추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옛날에 초롱을 닮았다고도 한다. 산행 중에 도라지나 잔대, 금강초롱꽃 같은 초롱꽃과에 속한 꽃을 만나면 숲속에 은은한 종소리가 퍼지는 듯, 보랏빛 불빛이 켜진 듯 잠시 밝아진다.

향적봉에 오르기 직전에 참바위취를 찾아보았다. 길 왼쪽 바위틈과 그 주변에서 3년 전에도 만났던 자리다. 올해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처럼 흰꽃과 붉게 익어가는 열매가 섞인 채였다. 해를 건너 같은 계절,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그 자리를 기억하고 있었고 참바위취는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향적봉 근처 대피소에서 싸 온 도시락을 까먹었다. 옆에 앉아 빵을 먹는 등산객에게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으니, 영각사에서 새벽에 출발해 쉬지 않고 왔단다. 종주를 위해 배낭 무게를 줄이려 음식도 최소한으로 줄였다고 말했다. 귤을 건네자 그들은 작은 빵 두 개를 내놓았다. 구천동까지 가는 하산길에 요기하라며 사양했지만 "이것도 다 짐이에요"라는 뻔한 거짓말을 하며 빵을 한사코 건넸다.

덕유산의 여름꽃 <시계 방향으로> 1. 어수리, 2. 곰취, 3. 속단, 4. 바디나물
▲덕유산의 여름꽃 <시계 방향으로> 1. 어수리, 2. 곰취, 3. 속단, 4. 바디나물 신극채
덕유산의 열매 <시계방향으로> 1. 괴불나무, 2. 풀솜대, 3. 꽃쥐손이, 4. 세잎종덩굴
▲덕유산의 열매 <시계방향으로> 1. 괴불나무, 2. 풀솜대, 3. 꽃쥐손이, 4. 세잎종덩굴 신극채

바람은 쉬지 않았고 꽃은 흔들렸다

대피소를 지나 중봉으로 향하는 능선에 들어섰다. 꽃의 종류는 더 다양해졌고 몰려든 곤충들로 꽃은 활기찼다. 어수리꽃에는 더 많은 곤충이 몰려들었다. 작은 꽃들이 모인 꽃차례는 넓고 평평했다. 잘 차려진 식탁이 앉아 있기도 편한 셈이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스마트폰을 가까이 가져가자 눈치 빠른 녀석이 먼저 날아가자 서너 마리가 뒤를 따랐다. 더 가까이 가지 않고 물러섰다. 같은 국화과 집안인 곰취와 바디나물 주변에도 붐볐다. 까치수염에는 표범나비가 날아들었고, 속단과 가는장구채에도 이름 모를 곤충들이 모여 바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꽃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어가는 식물도 있었다. 괴불나무와 풀솜대, 세잎종덩굴, 꽃쥐손이는 꽃이 지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때는 꽃이 피는 시기에만 관심을 두던 적이 있었으나 이젠 안다. 꽃 피는 순간만큼이나 열매가 영글고 낙엽이 지고 맨몸으로 추위를 견디는 시간도 소중하고 가치 있는 시간임을.

길 한편에는 작은 묘포장에서 어린 주목이 자라고 있었다. 그 곁에는 하얀 속살을 드러낸 앙상한 몸뚱이만 남은 고사목이 서 있었다. 덕유산을 비롯한 지리산과 소백산 등 고산지대에서 기후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고사하는 주목의 미래를 이어갈 후계목들이다.

덕유산의 여름꽃 <시계방향으로> 1. 일월비비추, 2. 원추리, 3. 긴산꼬리풀, 4. 참취
▲덕유산의 여름꽃 <시계방향으로> 1. 일월비비추, 2. 원추리, 3. 긴산꼬리풀, 4. 참취 신극채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중봉에 섰다. 아래로 펼쳐진 덕유평전에는 바람이 쉬지 않았다. 바람을 따라 원추리와 일월비비추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원추리꽃은 한창때를 지나 시들어가고 있었고 일월비비추꽃은 지금이 절정이었다. 숲이 아닌 능선에 자리 잡은 긴산꼬리풀과 참취도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렸다. 키가 큰 꽃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광경은 마치 덕유평전 전체가 춤을 추는 듯했다.

더 걷고 싶었다. 덕유평전을 따라 동엽령까지 이어진 능선을 따라가면 더 많은 꽃과 바람을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여기서 발길을 돌려도 아쉽지 않다. 돌아가는 길에서 올 때 놓쳤던 것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같은 길도 방향을 바꾸면 다른 풍경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이번이 아니라도 괜찮다. 여름은 아직 남아 있고, 걱정했던 무릎도 천천히 걸은 덕분에 큰 무리가 없었다. 시원한 바람을 만끽한 아내도 다음 산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위에 지쳤다면 덕유산의 여름꽃 길을 걸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곤돌라를 이용하면 산길을 힘들여 오르지 않고도 설천봉에 닿을 수 있다. 종주가 아니더라도 설천봉에서 향적봉을 거쳐 중봉으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고산의 다양한 꽃과 서늘한 바람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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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수염에 앉은 표범나비 까치수염 꽃 위에 표범나비 두 마리가 앉아 꿀을 빨고 있다. 한 마리는 날개 가장자리가 닳고 해져 있었다. 천적의 공격을 피하고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온 흔적처럼 보였다. 다른 한 마리는 날개가 온전했고 무늬와 빛깔도 선명했다. 비교적 최근에 우화한 개체인지, 낡은 날개의 나비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 신극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덕유산 #여름꽃 #천상의화원 #하늘정원 #향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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