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운계 김삼룡의 어머니 전운계
김광영
인민군 간부가 김삼룡의 둘째 형 김복룡을 별도로 만났다.
"김삼룡 동지의 유훈을 계승하는 것은 조국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입네다. 동무가 엄정면 인민위원장을 맡아주시오."
김복룡은 동생의 죽음에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실의에 빠진 어머니와 가족들을 건사해야 했다. 그런데 그러한 개인적인 일보다 북한군이 점령하던 인공시절에 인민위원장이라는 중차대한 직책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김복룡은 결국 김삼룡의 형이라는 이유로 엄정면 인민위원장을 맡게 된다.
항일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청년
김복룡은 용산리 공립보통학교 제5회 졸업생이다. 그가 입학한 1910년대는 보통학교 입학률이 1.7% 수준이었다. 100명 중 2명 미만이 입학했다는 이야기이다.
복룡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힘들었던 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은 순전히 어머니 전운계 덕분이었다. 국밥 장사를 통해 간신히 배고픔을 면한 전운계는 둘째 아들 복룡을 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만큼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뜨거웠던 것이다.
김복룡은 용산보통학교를 막 졸업한 동생 삼룡과 함께 서울로 올라갈 것을 결심했다. "어머니. 서울 가서 돈 벌어 오겠습니다." 동생 삼룡은 주경야독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이형제 선생이 동행한다는 말에 안심을 한 전운계는 급하게 빚을 얻었다.
빚을 내 자식들에게 준 돈은 교통비가 아니었다. 복룡·삼룡 형제는 걸어서 서울까지 갔다. 어머니가 준 돈으로는 비지떡을 사 먹었다. 허기만을 면하며 나흘에 걸쳐 서울까지 걸어간 때는 1920년대 중반이었다. 김복룡은 아버지 친구 집에 머물렀다.
그는 그곳에서 새벽마다 집 앞뒤 마당을 쓸었다. 동생 삼룡이 보통학교 시절 눈 오는 날 새벽에 학교 운동장을 전부 쓸은 것과 같은 일이었다. 다만 형 복룡은 매일 했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이 일로 인해 집주인의 눈에 띄었다. 복룡은 집주인인 아버지 친구의 소개로 전차 조수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김복룡이 전차 조수로 일하던 시절 툭하면 같은 또래의 일본 청년들과 갈등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주먹다짐으로 비화되었다. 싸움 결과 조선인 청년들만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1~2명이 구속되고 나머지는 풀려났다. 김복룡도 이때 고초를 겪고 풀려났다.
하지만 잠시나마 유치장 신세를 진 김복룡의 경험이 민족의식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궤짝에 지폐가 가득
'쟈는 또 어디다가 편지를 쓴다냐!' 전운계는 아들 복룡이 편지지와 씨름하는 모습을 보며 궁시렁거렸다. 서울에서 감옥살이를 한 후에 시골집에 내려온 아들은 매일이다시피 서울에 편지를 썼다. 어느 날 일본에서 온 편지를 읽더니 복룡의 얼굴이 활짝 폈다. "여보. 일본으로 가야겠소" 일본에 취직하러 간 엄정면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보고 김복룡이 아내 홍음전에게 한 얘기였다.
복룡은 일본으로 건너가 무역상선에 취업하여 선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한 번도 조선에 들어오지 않고 돈벌이에만 열중했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복룡은 받은 월급의 거의 전부를 고향으로 송금했다. 수신인은 어머니 전운계도 아니고 아내 홍음전도 아니었다. 큰형 김쌍용이었다. 쌍용은 타고난 구두쇠로 동생이 고생해서 번 돈을 한 푼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복룡이 보낸 돈으로 토지를 구매해 담배 농사를 지었다. 3,600평(10,800㎡) 규모로 농사를 짓다 보니 집에 건조실(현재 엄정농협 자리) 두 개를 짓고 담배 농사에 고용된 상시 노동자만 20여 명이었다.
담배농사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3월에 모판에 담배 씨뿌리기를 한다. 일명 '파종(播種)'이라고 한다. 5월에는 모판(묘상)에서 잘 자란 담배 모종을 일반 밭으로 옮겨 심는다. 이를 정식(定植)이라고 한다.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담뱃잎을 뜯어 건조실에서 약 1주일간 나무를 때 말린다. 그런 다음 담뱃잎을 크기와 색깔별로 구분해 짚으로 싼 꺼치로 포장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쌍용은 목계나루에 있는 수납장에 담배를 납품했다. 말 그대로 담배 농사는 고역이었다. 이전 과정에 일꾼들의 밥과 새참을 하는 일은 복룡의 아내 홍음전의 몫이었다. 그녀는 거기에다 시아주버니와 시동생들 건사도 해야 했다.
일이 고되기는 했지만, 당시 담배 농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복룡이 목계나루에 담배를 바치고 오는 날이면 벽장의 궤짝에 지폐가 한가득했다. 그 돈으로 쌍용은 일꾼들의 품삯을 주고 가족들에게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만 한 것이다.
복룡이 보낸 돈으로 쌍용이 토지를 사고 담배 농사를 지어 집안 경제가 자리를 잡았을 때 복룡이 고향 엄정에 왔다. 조선 땅을 떠난 지 10년 만이었다. 아내 홍음전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고생바가지를 한 탓에 피골이 상접했다.
복룡은 아내와 큰아들을 데리고 일본 고베시(神戸市)로 향했다. 일본에서 홍음전은 신혼 아닌 신혼생활에 입이 귀에 걸렸다. 남편이 무역선을 타 3개월에서 6개월마다 집에 왔지만 둘째 광영을 1942년도에 출산한 후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즐겼다.

▲김광영 백일 사진 왼쪽부터 김복룡, 큰아들 화영, 홍음전, 둘째 아들 광영. 일본 고베시에서 촬영.
김광영
가재도구를 부순 서북청년회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김복룡은 처자식을 데리고 고향 엄정으로 왔다. 하지만 복룡이 엄정에 있던 기간은 오래되지 않았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방직공장에서 사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복룡이 춘천에 있는 동안에 엄정에서는 큰 사건이 터졌다. 서북청년회(아래 서청)가 엄정 본가에 들이닥쳐 테러를 한 것이다. 김복룡의 동생 김삼룡이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조직책과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맡고 있을 때인 1947년경이었다.
홍음전이 사랑방에서 바느질을 할 때였다. 쾅하는 대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주인 전운계의 "뉘시오"라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불청객의 우두머리는 신발을 신은 채로 안방으로 향했다. 그가 이불과 가재도구를 마당으로 던지면 한 무리의 불청객들은 이불을 짓밟고 몽둥이로 가재도구를 부수었다. 다섯 살 광영과 돌을 갓 넘긴 병영은 울음보를 터뜨렸다.
서청의 만행은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당시 서청은 저승사자만큼이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엄정면 소재지에 위치한 서청사무실은 회원(단원)들 이외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으며, 서청 단원들이 부르기만 해도 오줌을 지리는 형국이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남조선의 내로라하는 공산주의자인 이 집의 셋째 아들 김삼룡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데야 집주인이고 이웃이고 감히 누가 나설 수 있었겠는가?
아이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우는 동안 홍음전은 둘째 아들 광영을 이불로 덮고, 셋째 아들 병영을 꼭 껴안고 울음을 참아야만 했다. 집주인 전운계와 큰아들 쌍용도 하늘만 멍하게 응시했다. 이날 서청의 테러는 서청 엄정면단장 남◯◯이 주도한 것이다.
한바탕의 회오리가 불고 난 집은 마치 흉가 같았다. 죄가 있으면 당사자인 삼룡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건만 충청도 한 시골 마을의 본가를 찾아와 행패를 부린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군인이나 경찰의 공식적인 국가조직도 아닌 민간단체인 서북청년회가 일으켰으니 말이다.
서청 1945년 해방 이후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토지개혁, 친일파 및 반동분자 청산, 종교 탄압 등을 피해 수많은 이북 출신(지주·자본가·개신교인·지식인 등) 청년들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와 만든 반공단체이다.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 강당에서 공식 출범한 서청은 좌익 테러의 선봉장을 자처했다. 대표적으로는 제주도에 파견되어 제주 도민들을 학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제주도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좌익과 민중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동생 처형 소식 듣고 눈물 삼킨 형, 인민위원장 되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