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표지
동학사
온 우주의 기척이 담긴 문장들
시집을 펼치니 가장 먼저 "시를 쓰는 동안 친구가 되어준 많은 곤충과 식물, 그리고 이 나라의 햇빛과 바람, 물소리에 감사한다"는 '시인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고백처럼 시집 안에는 자연의 작은 생명들과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그득 했다.
총 4부 중 1부부터 3부까지는 산문시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 4부에 이르러서야 정갈한 운문 시 형식을 취한다. 짧은 산문시 형태의 문장들이었지만, 그 안에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절제된 채 벼려져 있어 읽고 난 뒤의 여운이 유독 길었다. 한 번 읽고 휙 지나갈 수가 없어 입안에 오래 머금고 곱씹게 하는 고요하고 묵직한 힘이 있었다.
"누가 나에게 우리나라 가을을 실제 크기로 그리라고 한다면 나는 항아리에 물을 붓고 기다리겠습니다 저 푸른 하늘이 다 잠길 때까지."
<물로 그린 그림> 전문
"녹두만한 심장을 할딱이며 청개구리가 갈댓잎으로 뛰어오르자 허공이 반쯤 휘어집니다 멀리서 구름 지느러미가 못 본 듯이 유유히 흘러갑니다"
<하늘호수> 전문
"젊은 쇠똥구리 부부가 온 힘을 다하여 굴리며 갑니다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태안반도 물살들이 움찔움찔 물러납니다"
<쇠똥구리는 힘이 세다> 중에서
유재영 시인의 시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우주 속의 작은 생명체 하나가 재채기를 하면 온 우주가 들썩인다'는 세계관에 있다.
항아리에 부어 놓은 자그마한 물 한 그릇 속에 저 거대한 가을 하늘이 다 담기고, '녹두만 한 심장'을 가진 청개구리 한 마리가 튀어 올랐을 뿐인데 아득한 '허공이 반쯤 휘어'지며, 쇠똥구리가 온 힘으로 경단을 굴리자 태안반도의 거친 물살이 움찔 물러선다.
세상의 가장 작고 미미한 존재조차 우주 전체와 긴밀하고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시인의 시선은 깊고도 다정했다. 그것은 인간 중심적인 거대한 사회와 경쟁에 치여 스스로를 보잘것없다고 느끼던 내 마음을 가만히 다독여주는 깨달음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생각했다. 오늘 사람과 일에 치여 내가 무심코 내뱉은 긴 한숨이나, 소소한 기쁨에 터뜨린 작은 웃음소리조차 저 지구 어느 한 곳의 무엇인가를 살짝 건드리고 지나갈지도 모르겠다고. 보잘것없는 내 하루의 기척도 결코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거대한 우주의 무늬를 만드는 하나의 떨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경건하고도 묘한 위로로 다가왔다.
괜찮아지고 싶은 우리 머리 맡에
<와온의 저녁>을 다 읽고 책을 덮을 무렵, 무더위와 삶의 무게로 지쳤던 마음속으로 해질녘 와온 바다의 아늑함과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어린 물살들이 먼 바다에서 놀다 돌아올 때 마을 불빛들이 앞다투어 나와 물길을 환히 비춰주듯, 나 역시 누군가의 어두운 바다에 자그마한 불빛 하나를 더하고 싶어졌다.
좋은 글은 혼자만 간직하기엔 늘 아깝다. 이 아름다운 문장들이 보존서고의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기에는 그 안에 담긴 온기와 희망이 너무나 뜨겁다. 딸아이의 작은 손길이 나에게 유재영 시인을 선물해 주었듯,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이 시인을, 그리고 이 아름다운 시집을 소개해 주고 싶다.
도서관을 나오는 길, 더위는 아직도 저녁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폭염을 피해 들어간 도서관에서 나는 여름날 가장 소중한 보물을 발견했다. 안 괜찮지만 괜찮아지고 싶어 밭은 숨을 고르는, 위태롭고 평범한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와온의 저녁
유재영 (지은이),
동학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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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피해 들어간 도서관에서 만난 보물 같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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