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순찰차 "보이스피싱이 의심될때는 반드시 112신고로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박승일
지난 7월 21일 서울 관악구에서 발생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30대 중반의 남성이 은행에 직접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계좌에 있던 4천만 원을 모두 현금으로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것도 전액 5만 원 권으로 준비해 달라고 했다. 은행원은 고객의 행동과 말투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단순히 사업 자금을 인출하러 온 사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거액의 현금을 인출하는 이유를 묻자, 남성은 "의류 사업을 시작한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누구와 어떤 계약을 하는지, 현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후 은행원은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서류를 확인하는 척하며 질문을 이어갔고, 다른 직원에게 상황을 알렸다. 은행원은 경찰에 112 신고를 했고, 잠시 뒤 서울 관악경찰서 낙성대지구대 경찰관들이 은행에 도착했다. 경찰관들은 곧바로 남성을 몰아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사람에게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경찰을 믿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몇 차례 질문이 이어질수록 남성의 대답은 점점 짧아졌다. 경찰관들은 남성과 대화를 이어가며 통화 내역과 메시지에서 수상한 점을 인지했다. 누군가에게 보낸 '비밀 유지계약서'였다. 문서에는 투자와 관련된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알려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문구가 담겨 있었다. 가족과 친구는 물론, 은행 직원이나 경찰관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혼자만 특별한 투자 기회를 제공 받고 있으니, 외부에 알려지면 기회가 사라질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들은 추가로 휴대전화를 자세히 살펴보던 중 평소 국내에서는 많이 사용하지 않는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하나를 발견했고 그 안에는 피해 남성과 상대방이 주고받은 대화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남성은 시간대 별로 자신의 위치를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 출발한 시간, 지하철을 탄 시간, 은행에 도착한 시간까지 상대방에게 알렸다. 은행 창구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직원이 어떤 질문을 했는지도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계속해서 남성을 통제하고 있었다.
고수익 투자를 위해 자신의 일상을 보고하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것은 투자가 아니라 통제였다. 피해자가 가족이나 지인에게 상황을 알리지 못 하도록 고립시킨 뒤, 지시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전형적인 범죄 수법이었다. 결국 은행원은 현금 인출 절차를 중단했다. 그리고 출동한 경찰관들은 휴대전화에 설치된 앱을 삭제하도록 했다. 은행원의 세심한 관찰과 신속한 신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의 차분한 설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고객이 원하니 돈을 내주면 된다"거나 "본인이 투자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라고 생각했다면 피해를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드시 의심해야 할 말
지난해부터 해외에서 활동하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대한 집중 단속이 이어지면서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발생 건수와 피해액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많이 감소했다. 그만큼 많은 국민의 소중한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은 사라지지 않았다. 범죄자들은 수사 기관과 금융기관의 대응을 피하고자 끊임없이 새로운 수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검찰과 경찰, 금융기관을 사칭하던 방식에서 이제는 주식과 가상자산, 해외 선물, 공동사업, 고수익 투자 등을 내세우며 피해자에게 접근한다.
특히 "당신에게만 알려주는 정보"라거나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반복한다면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 비밀을 지켜야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은 피해자를 위한 약속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을 차단하기 위한 범죄자의 장치일 가능성이 크다.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경찰이나 은행만이 아니다. 피해자가 가족이나 친구에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지금 누군가가 현금을 인출하라고 하는데 이상하지 않아?"
"이런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한번 봐줄 수 있어?"
이 짧은 질문 하나가 수천만 원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가족이 아니어도 괜찮다. 친구나 직장 동료, 평소 믿고 의지하는 지인에게 이야기해도 된다. 혼자 판단하기 어렵다면 은행 직원이나 경찰관에게 물어봐도 된다. 범죄자는 피해자를 혼자 있게 만들지만, 범죄 예방은 사람을 다시 사람에게 연결하는 데서 시작된다. 혼자 고민할수록 범죄자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 이상했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이스피싱을 예방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돈을 보내기 전, 현금을 인출하기 전, 낯선 앱을 설치하기 전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범죄자가 만들어놓은 비밀의 벽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후배는 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최근 서울관악경찰서는 이러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관내 식당 테이블에 보이스피싱 예방 홍보물을 부착하고 있다는 것. 시민들이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테이블에 있는 QR 코드를 휴대전화로 촬영하면 보이스피싱 예방 숏폼 영상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영상에는 인기 아이돌 그룹 하이라이트가 제작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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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스피싱 예방 영상 서울관악경찰서는 관내 식당 테이블에 QR 코드를 이용해 보이스피싱 예방 숏폼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 서울관악경찰서
식당에서 우연히 본 짧은 영상 한 편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모은 재산을 지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영상을 본 사람이 가족에게 내용을 전하고, 그 가족이 다시 주변 사람에게 알려준다면 예방의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은 피해자에게 비밀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가족과 이야기하고, 친구와 이야기하고, 주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범죄자가 만든 비밀 유지계약서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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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방경찰청에 근무하고 있으며, 우리 이웃의 훈훈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현직 경찰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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