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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가 되어가는 남편, 독립하지 않는 아들... 어쩌면 좋지?

황보름 장편소설 <윗집 부부>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등록 2026.08.04 11:32수정 2026.08.0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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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빌딩을 배경으로 한컷 황보름 작가의 신작 윗집 부부. 왠지 아파트와 하늘을 배경으로 찍고 싶었다. 희망스럽게.
▲아파트 빌딩을 배경으로 한컷 황보름 작가의 신작 윗집 부부. 왠지 아파트와 하늘을 배경으로 찍고 싶었다. 희망스럽게. 정현주

70대 남자가 가슴께를 문지르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다. 젊은 애들은 눈 감고도 원하는 물건을 척척 찾아내지만, 70대 노인에게 편의점은 작은 미로다.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빠른 방법을 택한다. 알바생에게 묻는 것이다.

"면도기는 어디 있나?"
"저기요."


영혼 없는 알바생의 턱을 따라 시선을 옮기지만 금세 갈 곳을 잃는다. 알바생은 게임 삼매경이고, 남자는 진열대 사이를 오가다 가까스로 면도기를 찾는다. 하필이면 1+1 행사 상품이다. 노인에게 1+1은 반가운 횡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숙제다. 의미를 확인한 뒤, 알바생의 지시대로 면도기 하나를 더 가지러 진열대로 돌아간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을 나섰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다. 뭔가 끝내지 못한 일을 마치려는 듯 남자는 다시 편의점 문을 연다.

"내가 그렇게 못마땅한가?"

황보름 작가가 4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소설 <윗집 부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책 표지를 넘긴 지 10분도 안 되었고, 이제 겨우 12쪽에 왔을 뿐인데 나는 이 소설에 마음을 주고 말았다.

'아이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으이구, 꼰대 같으니라고.' 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혼잣말치고는 꽤 큰 목소리였다. 이유가 있었다. 가슴 밑바닥에 누수라도 난 듯 번지는 물기를 가리려는 의도였다. 내가 그렇게 못마땅한가. 나도 이 남자처럼 가슴께를 문지르며 천천히 쓸어내렸다.


늙어간다는 건, 매일매일 따지고 싶은 일이 늘어가는 것이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해되지 않았다.
삶이 힘들면 더 삶에 쩔쩔매기 마련이지 않나. 그런데 어째서 저 알바생은 저토록 게으르고도 무례한 태도로 힘든 삶을 누리는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면 지금 보이는 저 모습은 도대체 무언가.
<윗집 부부> 9쪽

70대 남자 경직, 그리고 내 남편

한 남자가 생각났다. 웨이브 머리를 찰랑이며 산으로 들로 촬영을 다니고, 밤을 새우면서 신나게 편집하던 남자는 이제 하나둘 소멸하는 머리카락을 세며 탈모 앰풀을 바르고 있다.


칠십은커녕 아직 육십도 안 된 내 남편에게 언제부터인가 따지는 습관이 생겼다. 뭐든 둥글게 둥글게 넘기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던 성격에 반해 결혼했는데, 이젠 뭐가 그리도 화가 나고 서운한지 흥분 스위치는 시도 때도 없이 켜진다. 지난달 동네 엄마들과의 치맥 자리에서도 남편의 잔소리와 꼰대 이야기가 배틀처럼 오갔기에, 나는 이 도입부에 마음을 줄 수밖에 없었다.

70대 남자 경직에게는 아내와 두 자녀가 있다. 살림에 충실하던 아내는 어느 날 '결혼 후회'를 선언하더니 트로트 가수의 사생팬이 되어 밖으로 돌기 시작한다. 아들은 결혼해 분가했고, 딸은 꽉 찬 나이에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 그렇게 집에는 정적 속에 놓이면 어쩔 줄 모르는 늙은 아빠만 남았다.

적막해진 경직의 집을 지키는 오랜 친구는 TV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뉴스다. 이날의 뉴스는 저출산이다. 그냥 저출산도 아니고 초저출산도 아니고 극초저출산이란다. 나라 걱정이 앞선 경직은 딸에게 전화해 어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고, 아들에게는 왜 둘째를 낳지 않느냐고 성화를 부린다.

이런 경직의 일상 안으로 한창 꽁냥꽁냥 신혼인 윗집 부부가 들어온다. 이들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싹싹하고 다정한 윗집 부부와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는 경직. 절대 궁합이 맞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은 하루하루가 쌓이는 동안, 어느새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이웃사촌이 된다.

아파트에서 마주치는 윗집 부부는 사랑 그 자체다. 서로에게 매달리고 안기고, 한 사람은 편의점으로 다른 한 사람은 떡볶이집으로 "요이땅"하며 달려가는 젊은 신혼부부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다. 힘겨운 취업 과정을 지나왔고, 취업 뒤에도 불안한 고용 상태와 경기 악화에 따른 권고사직을 겪는다.

봄(윗집 아내 이름)은 두려움과 불안의 차이를 알려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두려움은 호랑이나 어둠 속 움직임처럼 실제적 위협이 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었고, 불안은 명확한 이유나 대상 없이 추상적으로 밀려오는 감정이었다.
<윗집 부부> 91쪽

경직은 저출산을 해결해야 한다며 윗집 부부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권하고 싶지만, 이들의 형편에 아이는 언감생심 꿈같은 이야기다.

소설 <윗집 부부>에서 발견한 아들의 모습

나의 윗집 아랫집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윗집 아랫집을 찍어봤다. 저 안에 경직도 있고, 봄과 가을도 있겠지. 물론 나도.
▲나의 윗집 아랫집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윗집 아랫집을 찍어봤다. 저 안에 경직도 있고, 봄과 가을도 있겠지. 물론 나도. 정현주

윗집 부부의 대목에서는 또 다른 남자가 소환되었다. 캥거루족에서 한 단계 진화했다는 신캥거루족인지, 본가의 방 하나를 자기 원룸처럼 여기며 분가할 생각이 1도 없는 바로 우리 집 아들이다.

"미쿡 영화에서는 열여덟만 되면 집을 나가던데, 이제 독립하셔야 하지 않나요?"

이렇게 밀어붙이면 아들의 대답은 다다다다 랩처럼 쏟아진다. 이제 신입 딱지를 막 벗은 처지라고, 원룸 한 달 월세가 얼마인데, 식비와 전기요금, 관리비까지 혼자 살면 새는 돈이 얼마인 줄 아느냐고,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왜 월급의 단위는 몇십 년째 쥐꼬리 그대로일까. 징그럽게) 그 돈을 다 내고 어느 세월에 집 하나를 장만하느냐고, 물론 빨래와 밥을 해결해 주는 엄마의 서포트는 최고의 인센티브라는 말까지 단숨에 달린다. 한동안 여친이 있을 때는 딩크족이라더니, 요즘은 비혼주의란다.

내가 더 몰아붙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요즘 아들이 다니는 회사에 부분 매각설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하필 그 대상이 아들이 속한 팀이다. 나는 잘나가는 똑똑한 팀이니 매각 대상이 된 것 아니겠냐며 발연기를 한다. 지금 회사가 똥차라는 뜻은 아니지만, 더 멋진 스포츠카로 갈아탈 기회일 수 있다며 역시 1도 와닿지 않는 충고를 해준다.

3주 전 <윗집 부부>를 읽고 심장이 콩닥거리던 즈음, 황보름 작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궁금한 건 못 참지. 더군다나 나를 찡하게 만든 도입부인데. 나는 이 70대 남자의 모델이 누구냐고 물었다. 혹시 아버지냐고. 아니면 친척? 황보름 작가의 답은 간단했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주변 인물을 대입시키지 않아요. 70대 남자 주인공은 '경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설의 주인공이에요."

작가에게 경직은 실제 누군가를 옮겨놓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독자인 나는 경직에게 남편을 겹쳐놓고, 윗집 부부의 현실에 아들을 겹쳐놓았다. 책 속의 인물이 독자의 현실로 건너오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윗집 부부>를 읽는 동안 내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등장인물로 끼어들었다. 잠시 들어왔다가 사라진 카메오가 아니었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그들의 고민을 보여주고 숙제까지 남겼으니, 오히려 신스틸러에 가까웠다.

'어떡하지? 진짜 이러다 어떡하지?' 그런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마지막 장에 이를 즈음,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경직은 그 모든 사람이 맺은 관계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필연적으로 속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윗집 부부> 마지막 장, 326쪽

<윗집 부부>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저출산을 해결하겠다며 나선 경직은 과연 어디에 닿았을까. 30대 윗집 부부와 비혼을 택한 딸, 둘째를 망설이는 아들은 어떤 현실을 건너게 될까. 궁금하다면 500원을 준비하지 마시고, 직접 책으로 확인하시길 추천드린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우리 남편과 아들을 발견했다. 윗집 부부와 아랫집 할아버지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우리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불안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을 경직시키는 건 나이가 아니라, 저마다 품고 있는 불안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불안을 없앨 수는 없어도, 적어도 곁에 있는 사람을 그 불안 속에 혼자 두지 않을 수는 있었다. 남편이 또 무언가를 따지기 시작할 때 '꼰대'라며 놀리기 전에 한 번 더 이유를 묻는 것. 아들이 회사 이야기를 꺼낼 때 스포츠카 같은 서툰 위로를 서둘러 건네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것. 그렇게 서로의 사정을 한 번 더 들여다보는 동안 우리는 전보다 조금 덜 '경직'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혹시 어느 날 내가 꼰대 할머니가 되어 편의점 문을 열고 "내가 그렇게 못마땅한가?"라고 따지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누군가 이 책을 다시 내 손에 쥐여 주시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윗집부부 #황보름장편소설 #저출산 #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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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간 공중파 방송작가로 활동했습니다. 광고 시장에서 10년간 프로덕션을 운영했습니다. 현재는 브런치 크리에이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2025 국민이 함께하는 저작권 글 공모전-국무총리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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