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번의 강연보다 빛난 '기록의 힘'

<오마이뉴스> 교육시민기자학교에서 배운 '글쟁이의 절제와 책임'

등록 2026.08.04 10:17수정 2026.08.0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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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번의 강연자와 마이크 앞의 머뭇거림

첫날의 실패를 곱씹으며 둘째 날 아침을 맞았다. 일요일(2일)이었다. 연일 남부지방을 덮친 기록적인 더위는 서울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청중들은 양산이나 손부채로 강렬한 햇볕을 가린 채 <오마이뉴스> 서교동 마당집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의 핸드드립 커피 가내수공업은 오늘도 변함없이 바빴다. 달라진 것은 청중이었다. 본인의 강연 시간과 상관없이 강사진 역시 시작부터 자리를 지켰다.

강의에 앞서 청중들의 자기소개가 진행됐다. 첫날이 주로 교사들이었다면, 둘째 날은 다채로웠다. 포항에서 올라온 농민부터 헤드헌터, 경찰, 미술치료사, 증권가 종사자, 창원의 교사까지 다양한 삶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 대표의 강의가 시작되자 마음의 헛물살이 가라앉았다. 그의 강연이 눈과 귀에 깊이 들어왔다. 지난 10년간 1700번의 강연을 했고, 그중 절반이 중고등학생 대상이었다는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청중의 눈빛을 읽어내며 유연하게 호흡하는 모습에서 관록이 묻어났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깊은 부러움이 밀려왔다. 마이크 앞에서 여전히 머뭇거리는 나와, 청중을 품어 안는 노련한 강연자 사이의 거리를 다시금 실감했다.

서툴렀던 나를 감싸 안아준 따뜻한 시선

오 대표의 강의가 한창일 때 단톡방 알람이 울렸다. 어제 함께 연수를 들었던 박창현 시민기자의 후기 기사였다. (관련 기사 : 인공지능이 기사를 쓰는 시대, 시민기자의 역할, https://omn.kr/2j9mo )


오 대표의 강연을 듣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은 온통 그 기사에 가 닿아 있었다. 마이크 앞에서 서툴게 어버버했던 나의 두서 없는 이야기를, 청중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두려움 속에서 기사를 열었다. 기사를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부끄러웠던 나의 강연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아주고 있었다. 동호공고 폐교 사태, 수능 날 현장실습을 떠나는 아이들... 내가 마이크 앞에서 덤덤하게 내뱉었던 '쓰는 이유'가 그의 문장을 거치며 비로소 또렷한 형상을 얻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강연자와 청중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내 말을 들을 게 아니라, 현장에서 퍼 올린 자신의 묵직한 삶을 내게 들려주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현장의 공기를 온전히 퍼 올려 짧은 시간에 밀도 높은 기사로 엮어낸 그의 내공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기록되지 않은 현실은 사라지지만

2일 차 강연에서 최유진 편집기자는 최근 사회적 논란이 된 배재고 사태를 언급했다. 사건이 터진 뒤 세상은 시끄러워졌지만, 그 조짐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록되고 있었다. 광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교실 속 아이들의 혐오 발언을 몇 년째 기사로 기록해 왔고, 그 기록들이 사건 발생 후 비로소 세상의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 교사가 바로 이번 강연에서 내 역할을 맡았던 1기 현장론 강연자, 서부원 시민기자다.

윤근혁 기자 역시 배재고 취재기를 전했다. 다들 이미 알려진 이승만 동상 이야기만 되풀이할 때, 그는 학교 전자도서관을 끈질기게 뒤져 지만원의 책이 세 권이나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거창한 주장이나 호통 대신, 그 담백한 사실 하나만을 기사에 담았다.

우리 학교 도서관에 <공산당 선언>이 있다는 이유로 민원을 받았던 나에게 그 취재기는 남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장서를 혐오의 근거로 삼았고, 누군가는 그 장서 속에서 팩트를 발굴했다.

사건이 터진 뒤 거창한 구호를 외치기는 쉽다. 그러나 현장의 맥락을 묵묵히 기록하는 일은 어렵다. 글쓰기의 힘은 통쾌한 단죄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실의 크기 만큼만 절제하여 담아내는 책임에서 나온다. 서부원 기자의 묵직한 기록과 윤근혁 기자의 집요한 취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윤 기자는 덧붙였다.

"기자가 기가 빠지면 안 됩니다. 저도 20년 차인데, 교육부 장관에게 질문하려고 서 있으면 여전히 가슴이 떨립니다."

나 역시 그랬다. 34년 동안 단상에 섰으면서도 나는 왜 여전히 떨리는가. 돌아보니 그 떨림은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마이크를 잡은 자, 글을 쓰는 자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책임감이었다.

박창현 기자의 따뜻한 후기 덕분인지 2일 차 강의는 첫날보다 덜 후회스럽게 끝났다. 학생들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깔끔하게 수업을 마친 뒤 교실 문을 나설 때, 교사는 비로소 충만한 행복을 느낀다. 젊은 교사 시절 느꼈던 그 상큼한 기분까지는 아니었지만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수능 날 현장실습을 위해 일터로 출근하는 우리 학생들의 동행 취재 슬라이드를 설명할 때는 또다시 목이 메기도 했다. 공식 일정이 끝난 뒤 잔디마당에서는 아쉬움을 털어내려는 이들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신발을 벗고, 계급장을 내려놓고

마지막 세 번째 강연이 열린 8월 3일. 내가 일하는 직업계고 현장 역시 방학이 무색하게 가파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교내 AI 특화과정 연수 특강을 마치고 공사 현장까지 점검한 뒤에야 숨이 턱에 찬 채 서교동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또 다른 새로운 얼굴 25명이 진지한 눈빛으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같은 강연을 세 번째 반복했다. 세 번을 섰다고 해서 떨림이 무뎌지지는 않았다. 이로써 <오마이뉴스> 교육시민기자학교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처음 20명 단회성으로 기획했던 연수가 폭발적인 반응 덕에 회당 25명씩, 총 3회 75명 규모로 확대된 것이었다.

서교동 마당집 현관에 나란히 벗어놓은 신발들 현관에는 운동화와 구두, 샌들이 뒤섞여 있었다. 오연호 대표도, 교장도, 농민도 그 문턱 앞에서는 신발을 벗었다. 직업과 신분의 계급장을 내려놓고, 오직 '쓰는 사람'이라는 대등한 자격으로 한자리에 앉았다. 글 앞에 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서교동 마당집 현관에 나란히 벗어놓은 신발들 현관에는 운동화와 구두, 샌들이 뒤섞여 있었다. 오연호 대표도, 교장도, 농민도 그 문턱 앞에서는 신발을 벗었다. 직업과 신분의 계급장을 내려놓고, 오직 '쓰는 사람'이라는 대등한 자격으로 한자리에 앉았다. 글 앞에 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오성훈

창원, 포항, 강릉, 광주, 화천 등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이들이었다. 여든을 넘긴 교육학 박사부터 대학교수, 교사, 시민단체 활동가, 대학생, 경찰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삶의 스펙트럼도 다양했다. 오직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모인 이들이었다. 4시간 동안 빽빽하게 이어지는 강연 속에서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노트에, 노트북에, 휴대폰 카메라에 현장을 담아내던 그 열정적인 눈빛들. 함께 호흡해 준 75명의 청중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늘 긴장되는 시간이었지만, '뉴스게릴라'로서 같은 길을 걸어갈 동지들을 얻었다. 그들 앞에 감히 강연자라는 이름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커다란 영광이다.

내 이름을 걸고 쓰되, 담백하게

2일 차 질의응답 시간, "왜 교사도 필명이 아닌 실명으로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오연호 대표는 단호하면서도 명확하게 답했다.

"우리는 실명으로 갑니다. 책임과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발언하는 것의 무게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어 그는 비판의 윤리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누군가 70%만큼 잘못했다면, 딱 70%만 비판해야 합니다. 글을 쓰다 보면 감정이 앞서 100%, 120%로 과장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늘 반론을 듣고 취재해야 합니다."

내 이름을 걸고 쓰되, 넘치지 않게 담백하게 쓴다. 통쾌한 분풀이나 과장된 단죄 대신, 딱 사실의 크기만큼만 절제하여 담아내는 것. 사흘간 여러 강사의 입을 통해 변주된 이야기들은 결국 하나의 원칙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글 쓰는 사람의 '절제와 책임'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선순환은 이미 시작됐다. 박창현 기자에 이어 이점록·정지영 시민기자의 후기 기사도 <오마이뉴스>에 채택됐다. 나보다 먼저, 나보다 정확하게 그날의 공기를 옮겨 적은 글들이었다.

[관련 기사]
"좋은 교육 기사를 쓰려면" 4시간이 훌쩍 지났다, https://omn.kr/2j9pn
불편해지더라도, '노이즈'를 발신하며 살아갈 겁니다, https://omn.kr/2ja5z

교육시민기자학교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음 연수의 강연석에는 이번에 청중으로 함께했던 이들 중 누군가가 서 있기를 기대한다. 기록하고 연대하는 이 아름다운 선순환이 멈추지 않기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 #교육시민기자학교 #서교동마당집 #강연자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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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봇고등학교 교장. 『되풀이되는 비극, 따개비 현장실습』, 『디지털 대전환 시대 직업계고 미래는』 등 직업계고 학생들의 삶과 미래를 응원하는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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