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단청 아래 작은 풍경이 매달려 있었다. 물고기 모양 장식은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산사의 고요한 저녁에 맑은 울림을 보탰다.
최미향
화려한 단청, 대웅전 앞 백일홍, 담백한 산사
경내를 걷다 가장 오래 시선이 머문 곳은 전각의 처마 아래였다. 붉은색과 푸른색, 초록색이 겹겹이 이어졌고 꽃과 구름, 새를 닮은 문양이 목재 곳곳을 채웠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색은 더 선명했고 문양은 더 정교했다.
이 알록달록한 채색은 단청이다. 건물을 화려하게 꾸미는 장식이면서 목재를 비바람과 병충해로부터 보호하는 전통 채색이다. 화려한 단청 한가운데에는 작은 풍경이 매달려 있었다. 아래쪽의 물고기 모양 금속판은 바람을 받을 때마다 천천히 움직였다. 소리가 날 듯 말 듯 흔들리는 모습을 한동안 올려다봤다.
절의 색은 화려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담백했다. 강렬한 색들이 검은 기와와 부춘산의 초록 속에서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사찰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수반엔 둥근 연잎이 물 위를 덮고 있었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장독들이 줄지어 놓였고, 법당 앞 그늘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길게 늘어뜨린 채 쉬고 있었다. 무엇 하나 특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런 소소한 장면들이 발걸음을 늦추게 했다.
대웅전 앞에서는 백일홍이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짙은 초록빛 소나무 사이로 선명한 분홍빛 꽃송이가 솟아 있었다. 뜨거운 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난 꽃은 대웅전 앞을 묵묵히 지키는 작은 수문장 같았다.
백일홍 뒤로는 하늘을 향해 살짝 들린 대웅전의 처마 끝이 선명한 꽃과 함께 한 화면 안에 들어왔다. 넓은 잔디마당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 빈 공간 덕분에 바람이 지나가는 방향과 매미 소리의 높낮이까지 또렷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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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춘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서산 서광사의 전경 넓은 초록 잔디마당과 대웅전, 정자, 낮은 담장이 어우러진 산사의 저녁 풍경을 영상에 담았다. 매미와 닭 울음, 바람 소리까지 더해져 ‘소리가 있는 고요’를 느끼게 했다. ⓒ 최미향
천년의 역사보다 천년의 전승
서광사의 시작은 하나의 연도로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신라 말 최치원이 부성군 태수로 있을 때 부춘산의 상부와 중부, 하부에 암자를 세웠다고도 전한다. 다만 이를 확인할 기록은 뚜렷하지 않았다.
상부암과 중부암은 일찍 폐사했고 하부암만 남아 1980년대 초까지 삼선암이라 불렸다. 1986년 법장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뒤 전통사찰로 지정됐고, 이름도 서광사로 바뀌었다. 그래서 서광사를 '천년고찰'이라고 단정하기보다 '천년의 전승을 품은 절'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해 보였다. 확인되지 않은 창건 설화와 사라진 암자, 다시 세워진 전각이 겹쳐 오늘의 서광사를 이루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서광사가 오래전부터 소리로 기억됐다는 사실이었다. 삼선암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와 주변 풍경은 '선암모종'이라 불렸다. '삼선암의 저녁 종소리'라는 뜻으로, 서산팔경 가운데 제5경으로 전해졌다.
그 이야기를 알고 나니 저녁 6시의 서광사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오래전 사람들은 부춘산 골짜기로 번지는 종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날에는 매미와 닭과 바람이 저녁의 도착을 알리고 있었다. 시대도, 들려오는 소리도 달라졌지만 서광사는 여전히 소리로 기억되는 절인지도 모르겠다.

▲ 넓은 잔디마당 한가운데 자리한 범종각에는 범종과 법고 등이 함께 놓여 있었다. 알록달록한 연등과 부춘산의 초록 풍경이 어우러져 서광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했다.
최미향
사람을 품는 서광사 너른 초록 마당
평소 고요한 잔디마당에서는 산사음악회도 열린다.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가수들의 노래와 시민들의 박수가 이 넓은 마당을 가득 채웠다. 사찰의 고요와 대중음악의 환호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멀리하는 절보다 사람을 품는 절이 오늘날 사찰의 모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기도처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공연장이 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 말 없이 잔디마당을 걷는 쉼터가 되는 곳이 바로 서산의 서광사 사찰이다. 서광사는 템플스테이도 운영한다. 도심에서 멀리 떠나지 않아도 부춘산 숲을 곁에 두고 하룻밤 일상의 속도를 내려놓을 수 있다. 프로그램과 참가비는 시기마다 달라 방문 전 공식 누리집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 해가 부춘산 너머로 기울자 서광사 대웅전과 넓은 잔디마당 위로 저녁빛이 번졌다. 한낮의 열기가 조금씩 누그러지며 산사에도 느린 저녁이 찾아오고 있었다.
최미향
고요는 소리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었다
해가 부춘산 너머로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는 옅은 주황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낮 동안 쌓인 열기는 여전히 잔디마당 위에 남아 있었지만 바람은 조금씩 선선해졌다. 매미는 계속 울었고 산 아래에서는 또다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알록달록 연등과 여름의 절정을 수놓는 백일홍 가지가 천천히 흔들렸다.
매미와 닭 울음은 끊이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졌다. 그 소리들은 고요를 깨뜨리는 소음이 아니라 부춘산의 저녁을 이루는 한 부분처럼 들렸다. 풍경 아래 매달린 물고기는 바람을 기다렸고, 백일홍은 대웅전 앞을 지켰다. 고양이는 법당 그늘에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 서광사에서 알게 됐다. 고요란 세상의 소리를 모두 지우는 일이 아닌, 수많은 소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마음을 재촉하지 않는 상태라는 걸. 저녁 6시 서산 서광사 사찰에서는 땀방울도 마음도 잠시 쉬어 가는 '한여름의 쉼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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