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고택 안채 기둥에 익숙한 주련이 걸려 있다.
정명조
ㅁ자형 안채는 밖으로 난 문을 닫으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는 구조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익숙한 글씨체로 쓴 주련이 보인다. 추사가 죽기 전에 쓴 글씨다. 촌로의 으뜸가는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최고의 밥상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최고의 모임은 부부, 아들, 딸, 손자)

▲김정희 묘 묘 앞에 소나무가 있고, 그 위에 김정희와 두 아내의 합장묘가 있다.
정명조
김정희 묘는 추사 고택 왼쪽에 있다. 그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두 갈래 가지를 비스듬하게 뻗었다. 마치 세한도에 나오는 나무가 살아있다면 이와 같은 모습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암사
추사 고택을 나와 김정희 묘 뒤편으로 가면 백제부흥군길 5코스가 나온다. 예산역에서 추사 고택까지 이어지는 9.7km 길이다. 길은 넓고 잘 정리 되어있다. 그늘진 산길이어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매미가 경쟁하듯 악을 쓰며 울어댔다. 땀 냄새를 맡은 모기들이 포기하지 않고 따라다녔다.
1.2km쯤 되는 곳에 화암사가 있다. 김정희 가문의 원찰이다.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 '화암사중수상량문'과 '무량수각(無量壽閣)'과 '시경루(詩境樓)' 현판을 써서 보냈다. 절은 작고 조용하다. 무량수각과 시경루 현판은 수덕사 근역성보관 수장고에 있다.

▲천축고선생댁 화암사 뒤편 병풍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이다. 옹방강의 대문에 걸린 문구다.
정명조

▲시경 옹방강이 준 탁본을 새겨놓았다.
정명조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면 병풍바위 두 곳에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에 있는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은 김정희가 연경에 갔을 때 옹방강의 집 대문에 걸려 있던 문구다. 이는 인도의 옛 선생 즉 석가모니의 집이라는 뜻이다. 김정희는 이를 써서 새겨놓았다.
왼쪽 바위에는 '시경(詩境)'이 새겨져 있다. 시적인 정취가 넘쳐흐르는 풍치라는 뜻이다. 송나라 시인 육유의 글씨다. 연경에서 옹방강이 준 탁본 글씨를 가져와 새겼다.

▲소봉래 옹방강 집에서 보고 새겼다. 아래쪽에 추사제(秋史題)라고 써넣었다.
정명조
다시 500m쯤 더 가면 쉰질바위에 '소봉래(小蓬萊)'이라는 암각문이 있다. 그 밑에 추사제라고 써넣었다. 옹방강의 집 앞 돌에 봉래라고 쓰인 것을 보고, 자신을 작은 봉래라는 뜻으로 새겨 놓았다. 김정희는 소봉래학인, 소봉래주인, 소봉래, 봉래산초와 같이 봉래가 들어간 호를 여럿 만들어 쓰기도 했다.
추사는 화암사와 그 뒤에 있는 오석산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만들려고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옹방강과 관련된 여러 문구를 바위에 새겨놓았다. 그의 흔적을 그곳에 남기며 자신의 뿌리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화암사중수상량문 초본에도 '오래도록 소봉래의 선경을 꾸며주소서(長衛小蓬萊仙境)'라고 마지막에 기원했다.

▲화암사 느티나무 화암사 들어가는 길목에 느티나무가 있다. 추사가 태어날 때쯤 심어진 나무다. 특이하게 지나치게 큰 밑동아리에서 가느다란 가지가 하나 뻗어있다.
정명조
김정희는 71살에 과천에서 돌아가셨다. 초의선사는 제문에서 '학문은 하늘과 인간의 도리를 연구하여 백가의 꽃다운 윤기를 머금었고(學究天人 涵百家之芳潤), 필법은 천지조화에 참여하여 왕희지·왕현지 필법을 능가했으며(筆參造化 壓二王之縱橫), 시문에 뛰어나 세월의 영화를 휩쓸고(詩文傑出 劘戛雲霄), 금석에서는 작은 것과 큰 것을 모두 규명하여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金石精硏 窮覈細大 聲華播於華夏)'라고 썼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은 철종실록8권에 김정희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前參判金正喜卒 正喜, 吏判魯敬子, 聰明强記, 博洽群書, 金石圖史, 窮徹蘊奧, 艸·楷·篆·隷, 妙悟眞境 (······) 早歲蜚英, 中罹家禍, 南竄北謫, 備經風霜, 用舍行止, 世或比之於有宋之蘇軾.
전 참판 김정희가 졸하였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도사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해서·전서·예서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 조세에는 영명을 드날렸으나, 중간에 가화를 만나서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귀양 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으니, 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갔음을 세상에서 간혹 송나라의 소식에 견주기도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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