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카 절벽 아래 '오디세이' 롱숏 장면에서 느낀 것

자연 앞에 선 인간은 작고 외로운 존재

등록 2026.08.06 16:34수정 2026.08.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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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디세이> 스틸
<오디세이> 스틸 UPI 코리아

불이 꺼지고 리라와 아울로스의 낯선 선율이 스크린 뒤에서 나지막이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 저는 3000년 전 오디세우스가 마주했던 이오니아해의 파도 앞에 조용히 함께 서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The Odyssey)는 그렇게 저를 단숨에 신화의 한복판으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서구 문명의 뿌리이자 인류 서사시의 원형으로 오랫동안 자리해 온 작품입니다. 이 거대한 이야기를 현대의 거장이 어떻게 오늘날의 언어로 풀어낼지, 기대와 궁금증을 안고 극장에 들어섰습니다.

눈 맛 남다른 놀런의 신작

 <오디세이> 스틸
<오디세이> 스틸 UPI 코리아

개봉 후 일부 시각적 고증이나 신화적 요소를 축소했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직접 보고 나니 그런 지적은 다소 빗나간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로 응시하는 것은 신화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인간의 유한함과 성찰이기 때문입니다.

놀런 감독은 기술을 과시하는 대신 필름의 질감과 인물의 고뇌를 정직하게 앞세우는 길을 택했고, 그 선택은 원작의 무게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묵직한 감동을 남겼습니다.

요즘 많은 영화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판타지를 손쉽게 그려내는 것과 달리, <오디세이>는 전 분량을 65mm 필름 아이맥스 카메라로 직접 촬영했습니다. 필름 길이만 640km에 달한다고 하니, 그 집요함이 짐작이 갑니다.


거인족과 마주치는 장면도 CG 합성이 아니라 실제 키 차이가 나는 배우들과 원근법, 착시를 이용해 현장에서 그대로 찍어냈다고 합니다. 키르케 섬의 기이한 환영이나 해일과 소용돌이를 뚫고 나가는 해양 액션에서도 실사 장치와 편집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만들어내는 '눈 맛'이 남달랐습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정교함이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타카의 절벽 아래에서 아들 텔레마코스가 무예를 연습하는 롱숏, 망망대해의 수평선을 화면 맨 위쪽에 붙여 찍은 수직적 구도. 이런 장면들은 기술을 자랑하기보다, 자연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작고 외로운 존재인지 조용히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까지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이 영화는 원작의 비선형적 플롯을 살려, 두 개의 '정지된 시간'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칼립소의 섬에 갇혀 기억을 잃은 채 부유 하는 오디세우스의 시간, 그리고 이타카에서 시아버지의 수의를 밤낮으로 짰다 풀기를 반복하는 페넬로페의 시간입니다.

이 고여 있던 시간은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죄를 마침내 마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순간, 비로소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지나간 모험 자체보다 그 사건을 되짚고 의미를 곱씹는 '기억과 성찰'의 구조는, 관객의 호흡을 천천히 이끌며 사색할 여유를 건네주었습니다.

오디세우스 역의 맷 데이먼은 승전의 영광에 취한 영웅이 아니라, 오랜 전장의 기억과 과오의 무게에 짓눌린 늙은 군인을 과묵하게 그려냈습니다. 화려한 대사 없이도 표정과 몸짓만으로 전해지는 그 강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원작에는 없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전통에서 가져와 비중 있게 각색된 하인 '시논' 역의 연기도 눈에 띄었습니다. 거짓말과 약탈이라는 전쟁의 추악한 이면, 그리고 가장 슬픈 희생자의 얼굴을 서늘하게 보여주며 극 전체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젠데이아가 연기한 아테나 여신은 트로이 함락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여사제의 얼굴로 등장합니다. 이 설정 덕분에 아테나는 단순한 수호신이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양심의 거울'로 다시 읽히게 됩니다.

낯선 이를 맞아들이는 법

이 영화에서 저의 마음을 가장 오래 붙든 것은 '크세니아(Xenia)', 이른바 '제우스의 법'이라 불리는 주제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는 낯선 나그네나 이방인을 기꺼이 맞아 들이고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주는 환대의 윤리이자, 서로를 믿기 어려운 존재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약속이었습니다.

트로이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목마를 성 안으로 들임으로써 이 법을 지켰지만, 오디세우스와 그리스군은 그 환대를 피비린내 나는 학살로 갚았습니다. 결과와 효율만을 중시하며 공존을 저버린 그 폭력은, 이타카에서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는 구혼자들의 모습과 겹치며 지금 우리 사회를 향한 조용한 경고처럼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거지 몰골로 고향에 돌아와 무도한 자들을 단죄하고, 아내 페넬로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 뒤 왕좌마저 내려놓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어 부하들의 억울함을 위로하고 무너진 법을 다시 세우는 이 마지막 장면은, 환대와 약속이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극장을 나서며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삶에서 가장 참된 것은 만남이다"라는 마르틴 부버의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번 영화는 저에게 제 안의 양심과 마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성껏 빚어낸 필름의 질감과 선율, 그리고 배우들의 진심 어린 연기가 어우러진 이 시간은, 고난의 파도를 건너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돌아간 오디세우스처럼 저에게도 일상을 버텨낼 작은 용기를 남겨주었습니다.

오만함과 거짓을 벗고 온전한 인간으로 돌아온 그의 귀향처럼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타인을 향한 따뜻함을 잊지 않고, 스스로의 양심 앞에 정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대 세계를 정교하게 되살린 화면 속에서 발견한 인간에 대한 성찰. 오래도록 마음 한편에 은은하게 남을 것 같습니다.
#오디세이 #크리스토퍼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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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는 여전하고, 마음 한켠엔 늘 바다가 있습니다. 서울 하늘 아래 걷고 있지만, 그리움은 늘 남쪽을 향합니다. 조용한 산책길과 사소한 감탄 속에서 느리게, 그러나 단단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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