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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는 날까지 노래하다가..." 파도에서 노래를 건져 올리는 사람

    [100인 100색] 가수에서 문화인으로, 윤천금의 노래 인생

    등록 2026.08.15 13:35수정 2026.08.15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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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바다를 바라본다. 파도가 밀려왔다 다시 물러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파도가 부서지는 순간이면 그 속에서 지나온 삶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에게 바다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오랜 세월 곁을 지켜온 친구이자, 노래의 영감을 얻는 삶의 무대다. 젊은 시절 강릉 경포의 바다에 마음을 빼앗긴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노래가 그의 삶이었다면 바다는 쉼터였다. 화려한 무대에서 잠시 벗어나 바다 앞에 서면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이 보이고, 지나온 시간 속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인기와 화려함보다 사람의 이야기가, 삶의 흔적과 시간이 배어 있다.

    사단법인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한국가수협회 윤천금(74) 회장. 그의 삶에는 사람이 있고, 그의 노래에는 바다가 있다. 그는 젊은 시절 강릉 경포를 만나 바다와 함께하는 삶을 시작했다. 지금은 서울에 머물고 있지만 바다를 잊지 못해 거의 매주 바다를 찾는다. 파도 앞에 서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다시 새로운 노래를 생각한다.

    그에게 바다는 끝난 노래가 아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삶이며, 아직 부르지 않은 다음 노래다.

     바다에서 영감을 얻고 파도에 노래를 담는 윤천금 가수
    바다에서 영감을 얻고 파도에 노래를 담는 윤천금 가수 진재중

    산골 소년, 신인가수가 되다

    1952년 강원도 영월 상동에서 태어난 윤천금 회장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경북 안동으로 이주했다. 안동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그는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접한 음악은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젊은 윤천금에게 음악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통로였고, 훗날 가수의 길로 들어서는 출발점이 됐다.


    남다른 음악적 재능은 결국 가수의 길로 이어졌다. 1980년 봄, 당시 최고의 등용문이었던 TBC 신인가요제에 출전했다. 그 시절 신인가요제는 지금과 달랐다. 작곡가와 가수가 한 팀이 되어 경연을 펼쳤고, 그는 작곡가 장욱조와 호흡을 맞춰 신인가수상을 거머쥐었다. 그해 가요대상의 주인공은 조용필이었다. 윤천금은 그 무대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에는 '81년을 주름잡을 유망 가수'라며 신문에 크게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것이 꿈만 같았지요."


     1981년 당시 일간지에서 윤천금을 ‘떠오르는 가수’로 소개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신예 스타로 평가했다.
    1981년 당시 일간지에서 윤천금을 ‘떠오르는 가수’로 소개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신예 스타로 평가했다. 윤천금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KBS에 흡수되면서 그의 삶에도 거센 변화가 찾아왔다. TBC 전속가수였던 그는 하루아침에 설 무대를 잃었다.

    신인가수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시작했던 가수 인생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벽을 만났다. 방송 무대가 사라지면서 활동의 기회도 급격히 줄어들었고, 안정적이었던 삶의 기반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대를 잃는다는 것은 그에게 단순히 일자리를 잃는 것과 달랐다. 가수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공간을 잃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정말 막막했습니다. 가수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지요."

    무대를 잃은 그는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이후 필리핀과 태국 등 해외 위문공연 무대를 찾아다니며 노래로 삶을 이어갔다. 가수라는 이름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지만, 삶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화려했던 무대는 사라졌고 낯선 나라의 무대와 불안정한 생활이 그의 앞에 놓였다.
    그럼에도 그는 노래를 놓지 않았다. 무대가 어디든, 관객이 누구든 노래할 수 있다면 그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삶이 힘겨울수록 그에게 노래는 생계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지켜내는 마지막 힘이었다.

     방송 통폐합으로 가수의 길을 포기해야만했던 시절의 윤천금
    방송 통폐합으로 가수의 길을 포기해야만했던 시절의 윤천금 진재중

    파도가 부른 도시, 강릉

    윤천금 회장은 오래전부터 바다를 사랑했다. 화려한 도시의 무대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노래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삶을 꿈꿨다. 그리고 1987년, 그의 발걸음은 동해안 강릉으로 향했다. 강릉에 도착한 그는 경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 건물을 발견했다.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곳에 자신의 꿈을 담은 '윌카페'​를 열었다.

    윌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파는 카페가 아니었다. 윤 회장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공연장이자 문화공간이었다. 당시 동해안에는 가수가 직접 무대에 올라 노래하고 손님들과 함께 호흡하는 라이브 카페가 거의 없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윌카페는 문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릉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노래를 듣는 카페가 아니었다. 노래를 매개로 사람들이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웃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노래를 통해 사람들이 만나고 웃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윌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사람과 음악이 만나는 문화의 공간으로 성장했다. 경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카페 하나가 강릉의 음악과 사람을 연결하는 특별한 무대가 된 것이다.

     윤천금을 끌어들였던 경포 앞바다
    윤천금을 끌어들였던 경포 앞바다 진재중

    그에게 강릉은 단순히 머무는 곳이 아니었다. 다시 노래할 수 있는 무대였고,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윌카페는 전국의 유명 가수와 배우, 코미디언들이 자연스럽게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연예인들이 강릉을 찾으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 중 하나가 됐다. 무대에서만 보던 스타들이 카페에 나와 시민들과 어울리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어느새 윌카페의 익숙한 풍경이 됐다. 연예인을 직접 만나기 위해 시민들이 카페를 가득 메우는 날도 많았다.

    한 곡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사이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윌카페는 단순히 노래를 듣는 공간을 넘어 가수와 시민이 음악으로 만나고 소통하는 공간으로 강릉의 새로운 문화공간이 되어갔다.

    "당시에는 선후배 연예인들이 동해안에 오면 자연스럽게 윌카페를 찾았습니다. 가수뿐만 아니라 배우와 코미디언 등 많은 연예인들이 강릉에 오면 들르는 곳이었죠. 그때만 해도 강릉시민들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을 직접 만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예인이 윌카페에 온다는 소문이 나면 시민들이 직접 연예인을 만나기 위해 카페를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윌카페는 한 사람의 작은 꿈에서 출발해 강릉 문화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노래가 있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낯선 이들을 친구로 만들며, 강릉이라는 도시를 음악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직접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고객들과 함께했던 윌까페
    직접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고객들과 함께했던 윌까페 진재중

    가수에서 지역문화 전령사로

    사람들은 그를 가수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의 삶은 무대에만 머물기에는 너무 넓었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래에 이야기를 담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각종 방송 프로그램의 리포터와 진행자로 활동하며 강릉의 아름다운 바다와 문화,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국에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카메라 앞에서는 진행자로, 현장에서는 리포터로 사람들을 만나며 지역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보다 때로는 지역의 문화와 사람을 만나는 현장을 더 자주 찾았다. 그에게 노래는 자신을 알리는 수단에 머물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강릉과 세상을 연결하는 하나의 언어였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유행보다 삶이, 기교보다 진심이 담겨 있다. 가수로 시작했지만 그의 삶은 방송과 사람, 그리고 강릉의 바다로 자연스럽게 넓어졌다.

    그가 걸어온 길은 결국 하나의 노래였다. 자신의 노래를 넘어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그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노래였다.

     방송 진행자로 리포터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윤천금
    방송 진행자로 리포터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윤천금 윤천금

    경포호를 바라보며 살아온 윤천금 회장은 또 하나의 꿈을 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경포호에 오래도록 남을 상징을 하나 만들고 싶었다.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경포호의 풍경과 노래, 그리고 그곳에 깃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사공의 노래비'​다.

    윤천금 회장은 당시 방송 프로듀서와 함께 경포호에 노래비를 세우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후 '사공의 노래' 작사가의 차남 함태영 씨와 뜻을 모으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경포호에 돛단배가 떠 있고,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사공의 노래'를 들으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풍경과 노래를 오래도록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은 결국 현실이 됐다. 돛단배가 떠 있는 아름다운 경포호를 배경으로 '사공의 노래'를 기억할 수 있는 노래비가 세워졌다. 한 편의 노래가 경포호의 풍경과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에게 사공의 노래비는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다. 1987년 바다를 찾아 강릉에 내려와 경포호를 바라보며 노래했던 시간, 윌카페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웃었던 기억, 그리고 강릉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자신의 인생 한 페이지다.

    지금도 그는 경포호를 찾으면 노래비 앞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노래비에 새겨진 가사를 읽으며 처음 경포호를 마주했던 그날을 떠올린다. 바다를 사랑해 강릉으로 내려왔던 시간, 경포호를 바라보며 노래했던 순간들이 하나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경포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물결은 오늘도 바람을 따라 잔잔히 일렁이고, 돛단배가 떠 있는 풍경도 예전과 다르지 않다. 그에게 '사공의 노래비'는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물이자, 자신이 사랑했던 강릉과 경포호에 바친 한 사람의 노래다.

     돗단배와 달을 그대로 형상화한 사공의 노래비
    돗단배와 달을 그대로 형상화한 사공의 노래비 진재중

    바다는 제2의 고향입니다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있다. 그는 지금도 거의 매주 강릉을 찾는다. 경포 바다를 바라보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부른다. 때로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바다와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에게 바다는 잠시 머무는 여행지가 아니다. 젊은 시절 삶의 터전을 옮겨와 노래하고 사람을 만났던 곳이며,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다.

    "바다는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강릉은 제2의 고향입니다."

    그가 바다를 찾는 이유는 단순한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파도를 바라보면 지나온 세월이 떠오르고, 파도 소리를 들으면 다시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화려한 무대에서 수많은 관객 앞에 서 왔지만, 그에게 가장 오래된 청중은 언제나 바다였다.

    오늘도 그는 경포 바다 앞에 선다. 파도가 밀려오고 다시 물러간다. 그는 그 파도에 조용히 노래를 건넨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가 사랑한 바다와 그 바다를 향한 노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동해안 바닷가
    동해안 바닷가 진재중

    윤천금 회장은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를 묻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노래 인생입니다."

    그에게 노래는 직업이 아니라 삶이었다. 기쁠 때도 노래했고, 힘들 때도 노래했다. 무대를 잃었을 때도, 다시 일어설 때도 노래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죽는 날까지 노래하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때로 한 곡의 노래와 닮아 있다. 윤천금 회장의 삶도 그랬다. 화려한 조명 아래 신인가수로 출발했지만 시대의 격랑 속에서 무대를 잃었고, 다시 바다를 품은 강릉에서 새로운 무대를 만들었다. 그는 노래를 통해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꽃피우고, 도시의 기억을 만들어 왔다. 경포해변의 '윌카페'는 사라졌지만, 그곳에서 울려 퍼졌던 노래는 여전히 강릉 사람들의 추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오늘도 그는 후배들의 무대를 지키며 또 다른 노래를 이어가고 있다.

     바다를 바라보며 노래에 대한 영감을 얻고 있는 윤천금 가수. 파도에 마음을 담고, 바다에서 삶과 음악의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바다를 바라보며 노래에 대한 영감을 얻고 있는 윤천금 가수. 파도에 마음을 담고, 바다에서 삶과 음악의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진재중

    #윤천금 #신인가수상 #강릉 #경포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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