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표지
민음사
이디스 워튼의 <여름>은 한 여성의 사랑 이야기처럼 시작하지만, 책장을 덮고 난 뒤 내게 남은 것은 사랑보다 더 깊은 질문이었다.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처음에는 계절을 읽는 즐거움이 컸다. 초여름의 푸른 기운, 한여름의 눈 부신 햇살, 비 내리는 날의 눅눅한 공기, 어느새 스며드는 초가을의 쓸쓸함까지. 이 소설에서는 날씨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마음을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햇빛이 강해질수록 채리티의 감정도 자라고, 비가 내리면 숨겨 두었던 불안이 모습을 드러낸다. 계절이 저물수록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가면서도 그것이 현실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깨닫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아름다운 풍경을 읽으면서도 마음 한편은 계속 아팠다. 채리티가 성장하는 만큼 그녀 앞에 놓인 현실의 벽도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채리티는 산간 빈민 공동체에서 태어나 작은 마을 노스도머에서 성장한다. 로열 변호사의 보호 아래 살아가지만 그녀가 머무는 세계는 좁다. 마을 도서관에서 일하며 더 넓은 삶을 꿈꾸지만, 그곳을 향해 갈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런 그녀 앞에 도시에서 온 젊은 건축가 하니가 나타난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도서관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채리티를 지나치던 하니가 어느 순간 그녀를 제대로 바라본다. 그 짧은 순간 채리티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발견되었다는 감각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 역시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나는 이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채리티의 첫사랑은 단순히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사건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통해 자신도 욕망할 수 있는 존재이며, 무언가를 꿈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책 속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녀의 새로운 자아가 신비롭게 펼쳐지는 것, 그녀의 오그라든 덩굴손이 빛을 향해 손을 뻗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이 문장을 여러 번 읽고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오랫동안 움츠리고 있던 덩굴손이 햇빛을 향해 조금씩 방향을 바꾸는 모습이 떠올랐다. 채리티의 여름도 그랬다. 사랑이 그녀를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랑을 통해 자기 안에도 빛을 향해 자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1917년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채리티는 매우 대담한 인물이다. 당시 여성에게 기대되던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알고, 자신의 욕망을 인정한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선택받기만 하는 여성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지금까지도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채리티가 끝까지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를 가로막은 것은 사랑의 부족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교육과 계급, 출신과 기회의 차이가 있었다. 하니에게는 도시로 돌아갈 기반과 미래를 만들어 갈 조건이 있었지만, 채리티에게는 그 삶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이어 갈 토대가 부족했다.
더 마음 아픈 것은 채리티가 현실 때문에 포기하는 모습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부끄러움과 두려움. 그것은 단순한 열등감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의 자리라고 믿어 온 삶의 경계였다.
빛을 향해 뻗어나가는 덩굴손
그 부분에서 나는 채리티를 바라보며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내가 결정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포기할 이유를 먼저 찾았던 순간도 있다.
나 역시 아이들을 키우고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내 선택으로 살아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모든 선택이 온전히 자유롭지만은 않았다. 누구도 하지 말라고 한 적 없는데 '지금은 안 돼', '나와는 어울리지 않아', '여기까지면 충분해'라고 스스로 선을 그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현실을 먼저 생각했던 일, 시간이 없다고 미뤄 둔 일, 상황이 어렵다는 이유로 접어 둔 꿈들. 돌이켜보면 아무도 막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멈춘 순간도 있었다. 어쩌면 가장 높은 벽은 세상이 만든 벽이 아니라 내 안에 오래 자리 잡은 기준인지도 모른다.
채리티의 마음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오래전 시대의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원하는 삶과 선택할 수 있는 삶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이 만든 한계보다 자신 안에 만들어진 한계 때문에 더 오래 머뭇거린다. 채리티 역시 주체적인 사람이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작게 믿고 있었다. 사랑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된 삶의 크기를 먼저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름>은 100년이 넘은 소설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발견했지만 시작할 조건이 부족했던 경험, 마음보다 생계와 책임을 먼저 생각했던 시간, 감정보다 현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 지금도 우리는 원하는 삶과 선택할 수 있는 삶 사이에서 수없이 망설인다.
채리티와 하니를 멀어지게 한 것은 사랑의 크기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쌓인 기회의 차이였다. 사랑은 채리티를 성장시켰지만 그녀를 구해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랑은 그녀가 얼마나 더 넓은 세상을 원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했고, 동시에 그 세상에 닿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사랑 이야기만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보다, 지금 자신의 삶을 한 번쯤 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지만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현실적인 이유로 오래 미뤄 둔 꿈이 있는 사람, 혹은 지금의 삶이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인지 문득 궁금해지는 사람이라면 채리티의 여름을 따라가 보았으면 한다.
이 소설은 '꿈을 이루면 행복하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위로하지도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마음을 발견한 뒤에는 이전과 똑같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책을 읽으며 느낀 것도 그것이었다. 삶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사건만은 아니다. 누군가의 한마디, 한 번의 만남, 한 권의 책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마음을 깨울 때가 있다. <여름> 속 채리티에게 그 계절은 짧은 해방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처음 발견한 시간이기도 했다.
여름은 지나간다. 뜨거웠던 순간도 언젠가는 끝난다. 하지만 한 계절이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 채리티의 여름은 완전한 자유를 허락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계절을 지나며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도 오래 움츠리고 있던 덩굴손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막힌 적 없지만 스스로 빛을 향해 뻗기를 주저했던 마음.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그런 덩굴손 하나를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여름>은 계절을 닮은 소설이 아니라, 한 사람이 가장 뜨겁게 자신을 발견했던 시간을 닮은 소설이었다. 그리고 책장을 덮은 지금, 나는 내 안의 작은 덩굴손도 다시 한 번 빛을 향해 뻗어 보기를 바라게 되었다.
여름
이디스 워튼 (지은이), 김욱동 (옮긴이),
민음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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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를 읽고, 글을 씁니다.나이 들어가는 삶의 감각과 가족. 부부의 시간, 일상에서 건져 올린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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