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미술로 풍덩, 5시간 내내 머문 곳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Ⅱ' 를 산책하다

등록 2026.08.10 14:57수정 2026.08.1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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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종일 집 안에만 있는 것이 편하겠지만, 지난 7일 우리 가족은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며느리와 손자는 국립과천과학관으로 향하고, 나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금요일 오전이어서 비교적 한산했다. 미술관 입구에서 내려 달라고 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양산을 쓰고 조금은 걸어보고 싶었다. 조각공원에서 미술관까지 이어지는 길은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이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낙엽이 쌓인다.


여러 번 찾았던 곳이지만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걸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돌과 나무 사이에 놓인 조각 작품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이마에는 땀이 맺혔지만 발걸음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이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 마음을 비워주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포스터<한국근현대미술Ⅰ>
포스터<한국근현대미술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니 먼저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관람객을 맞는다. 과천관을 찾을 때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작품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제작된 이 거대한 비디오 타워는 1003대의 브라운관 모니터로 이루어져 있다. 늘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 다시 과천 현대미술관에 왔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내 생각에 <다다익선>은 이 미술관의 상징이자 시간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존재 같다.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편지

'한국근현대미술Ⅰ·Ⅱ' 상설전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시대 순으로 보여준다. 특히 이건희컬렉션 기증으로 소장품이 한층 풍성해지면서 한국 미술 백여 년의 흐름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상설전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전시는 20세기 초반으로 시간을 되돌리며 시작된다.

조석진의 <춘일금강>을 비롯한 초기 작품들은 아직 조선의 산수화를 품고 있다. 먹과 붓으로 그려낸 금강산에는 전통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서양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 우리 미술이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출발점 같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전통 위에 새로운 화법이 더해진다. 유학파 화가들이 등장하고 한국 미술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전시장 한쪽에서 작은 액자 하나가 발길을 붙잡는다. 나혜석의 <화령전작약>이다. 상설전에 걸린 그의 작품은 단 한 점으로, 이 작품 역시 이건희컬렉션으로 기증된 작품이다.

그림을 보며 화사한 작약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시대를 앞서 걸었던 한 여성의 삶이었다. 지금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 화가로 기억되지만,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시대는 결코 꽃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단 한 점의 그림이 오히려 그녀의 삶을 더 깊이 생각하게 했다.


이인성의 <계산동 성당> 앞에서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붉은 벽돌 성당과 푸른 하늘이 만들어내는 색감은 유난히 밝고 따뜻하다. 서양화법을 받아들이면서도 한국의 빛과 공기를 담아내려 했던 화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전시는 해방과 전쟁의 시간을 지나간다. 이중섭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 앞에서는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편지를 바라본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한 줄 한 줄 가슴에 닿는다. 예술가 이전에 한 사람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그의 삶이 그림보다 먼저 다가온다.

그리고 박수근의 작품들을 만났다. 엽서와 달력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그림들이지만 실제 작품 앞에서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절구질하는 여인, 골목을 지나는 노인, 아이를 품은 어머니…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가 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화강암 같은 거친 질감이 살아나고,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온기가 전해진다. 화려하지 않기에 더 오래 남는 삶의 풍경이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미술은 또 다른 변화를 맞는다. 풍경을 그대로 그리기보다 자연과 마음의 본질을 담아내려는 화가들이 등장한다. 김환기의 <달 두 개> 앞에서의 반가움이 그러했다. 몇 해 전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전' 에서 만났던 작품들이 떠오른다.

그때는 김환기의 추상적 작품만 따라다녔지만, 이번에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다시 만났다. 두 개의 달은 밤하늘이기도 하고, 고향이기도 하고, 마음속 풍경이기도 하다. 설명하려 할수록 멀어지고, 오래 바라볼수록 가까워지는 그림이었다.

그림 앞에서 읽어낸 마음

이번 전시에서 가장 오래 머문 작품은 윤형근의 <청다색 靑茶色>이었다. 첫눈에는 그저 무겁고 어두운 그림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그 어둠은 색이 아니라 시간처럼 느껴졌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가난과 산업화… 한국 근현대사가 지나오며 견뎌야 했던 무게가 짙은 남색과 갈색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저 무거운 색채가 조금만 걷혀도 세상이 한결 밝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그림의 의도가 아니라, 그림 앞에 선 내가 읽어낸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윤형근을 지나 마지막 전시실에서 만난 백남준의 <브람스>는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빛과 영상, 음악이 하나가 된 작품 앞에 서니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붓으로 시작된 한국 근현대미술은 마침내 세계와 소통하는 새로운 언어를 갖게 된다.

백남준 브람스
▲백남준 브람스 신혜솔

조석진의 산수에서 시작된 시간이 나혜석과 이인성, 이중섭과 박수근, 김환기, 윤형근을 지나 백남준의 빛으로 이어진다. 백 년의 시간이 하나의 흐름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오래 머문 작품은 손에 꼽을 만큼 몇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번 상설전은 모두 254점의 작품을 통해 한국 근현대미술 백여 년의 흐름을 보여준다. 내가 오래 바라본 작품들은 그 거대한 시간 속에서 우연히 마음이 머문 몇 개의 쉼표였을 뿐이다.

밖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다섯 시간 가까이 전시장에 머물렀다. 미술관을 나왔을 때도 폭염은 여전했다. 하지만 들어올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잠시나마 한국 근현대미술 백 년을 걸어 나온 뒤라서였을까. 한낮의 더위보다 화가들이 살아낸 시대와 그 속에서 피어난 예술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생각해 보니 미술관은 그림보다 시간을 품고 있는 곳이었다.

신나게 놀고 온 손자를 주차장에서 다시 만났다. 아이는 아이의 시간을 보냈고, 나는 나의 시간을 보냈다. 같은 여름날,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만난 하루, 그 하루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포스터<한국근현대미술Ⅱ>
포스터<한국근현대미술Ⅱ>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미술관 #과천 #근현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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