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오기 전에 책 표지
현암사
1세기를 건너 공개된 프루스트 미공개 단편
<밤이 오기 전에>는 프루스트 작품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책이다. 지난 몇 년 프랑스 문학계에선 프루스트의 미공개 원고가 새로이 출간되고 다시금 평가를 받는 보기 드문 일이 이뤄졌다. 2019년 단편 8편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공개된 게 그 시작이었다. 한국 출간작 <밤이 오기 전에>는 위 단편 8편을 비롯해,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보다 십 수 년 앞서 출간했던 단편집 <즐거움과 나날> 등에 수록한 작품까지 포함해 묶은 소설집이다.
모두 18편의 짤막한 소설이 두 개 장으로 나뉘어 들어찬 소설집이다. 모두 작가가 20대 초중반에 쓴 초기작으로, 생전에 발표한 6편이 첫 장에 실렸고, 사후 공개된 12편이 다음 장에 들었다. 사후 공개된 12편 가운데는 앞서 언급한 2019년 공개된 8편과 20세기 중반 프루스트 연구자들에 의해 공개된 4편의 작품이 묶였다. 한국어 번역본으론 찾아보기 힘든 글인 만큼 프루스트에 관심이 있는,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데 엄두가 나지 않는 독자들에게 좋은 선택지가 되어주리라고 여긴다.
책은 이들 단편과 이를 통해 시도한 실험들이 프루스트의 문학 세계를 이루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하게 한다. 단편소설이라 하면 흔히 떠오르는 통상적 관념과 여기 실린 작품들 사이의 격차는 곧 프루스트의 문학과 대중이 소설이라 여기는 것 사이의 거리처럼 보인다. 채 500자가 들어가지 않는 작은 판형으로 너덧 쪽이면 끝을 보는 짤막한 소설들은 대부분 이렇다 할 사건이나 줄거리라 할 것을 품고 있지 않다. 대신 묘사와 대화가 주를 이루는데, 그로부터 부각되는 인상이 곧 소설이 전하는 감각 그 자체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이는 그대로 저 유명한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의 특색과도 닿는다. 프루스트가 작품 초고를 당대 프랑스 유력 출판사들에 전달했을 때, 그는 그들 모두로부터 거절 통보를 받았다. 이때 유명 출판사 올렌도르프(Éditions Ollendorff) 사장이 답한 편지글은 이 소설이 어떤 작품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제가 둔감해서인진 모르겠지만 어느 신사가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뒤척이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30페이지를 할애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소설을 읽는 오늘날 독자들도 마찬가지로 당혹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 같은 특징은 그저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라는 한 작품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그대로 프루스트가 오랜 기간 닦아온 문학적 특성이다. 구태여 이야기를 나아가지 않고 머무르게 한 프로스트의 작법은 그로부터 얻어내고자 하는 미학적 효과가 있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서사가 부재하고, 그로 인하여 인물이 단편적이고 사건이 단선적이게 되는 문제를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써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저 어린 시절 먹었던 마들렌의 잊지 못할 맛 정도는 아니었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프루스트 문학에 접근하는 길
<밤이 오기 전에>에 실린 여러 작품은 그대로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속 어느 에피소드를 떼어 놓은 듯한 인상을 안긴다. 이를테면 1896년 발표한 '무관심한 이'는 남편을 잃은 귀족부인 마들렌이 오페라 극장 등지에서 자신에게 무관심한 사내 르프레에게 품게 되는 진한 감정을 묘사하는데, 이때 쓰이는 주요한 소품이 고스란히 훗날의 장편으로 이어진다. 표제작 '밤이 오기 전에'에서도 자신이 동성애자란 사실을 고백하는 인물의 말이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서 비슷하게 반복되게 된다. 이밖에도 동성애를 소설 안에 주요하게 반영한 가장 앞선 작가 중 하나로 평가되는 프루스트의 특징이 여러 단편 가운데 확인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와 같은 특성은 그대로 소설집 <밤이 오기 전에>의 가치가 되어준다. 세계 문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고전임에도 읽기가 지극히 까다로운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의 맛보기로 제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프랑스 사교계의 소위 상류층 인사들의 관계와 그로부터 드러나는 인간의 본래적 면모를 여러 단편을 통해서도 단편적이나마 맛볼 수 있다. 프루스트의 스타일이 문학사에서 정말로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면, 이 책이 가진 의미 또한 비례할 것이라 여긴다.
한편으로 프루스트 문학의 참된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도 이 작품은 일독할 의미가 있다. 기실 프루스트에 대한 평가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문학계에서 차지하는 높은 위상에도 정작 그를 읽어본 이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부터 그렇다. 아마도 극악한 가독성이 이유일 것이다. 오죽하면 이와이 슌지가 저 유명한 <러브 레터> 속 '끝내 누구도 펴보지 않기를 바란' 책 한 권으로 이 책 전집 네 번째 권을 택해 핵심 소품으로 활용했겠는가. 하하하.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사람들로서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정독하지 않고 대충 읽어보기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강의자들 대부분이 그런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중에서
스스로가 파리 제8대학 불문학부 교수이면서도 문학계의 실체를 은근히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온 피에르 바야르의 책 가운데서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은 흔히 읽지 않고서도 읽은 척 하는, 또 높이 치는 것만으로도 발화자 자신이 있어 보이는 대표적 예시로써 몇 차례에 걸쳐 거론된다. 뿐만 아니다. 작품 안에 사회를 반영하는 것을 문학의 주요한 사명으로 바라본 앙가주망 계열, 또 실존주의에 바탕을 둔 작가들이 프루스트를 호되게 비판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 패기 있는 평자들 사이에서도 이 같은 비판이 이어져 왔으나, 고전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현대에 이르러 도리어 프루스트의 권위는 도전 받지 않는 성역이 된 듯한 인상이다.
상류층 인사로 사교계에 먼저 입성한 뒤 문학가로 걸음을 내디딘 이력, 데뷔작 <즐거움과 나날>부터 대문호 아나톨 프랑스를 비롯해 사교계에 자리한 문학가들의 극찬을 받은 사실, 대표작인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가 주요 출판계의 선택을 받지 못했음에도 자비 출판과 동료 작가들의 극찬 속에 높은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는 점 등이 여러모로 흥미로운 뒷얘기가 되겠다.
이러나 저러나 오늘날 독자는 그 실체를 읽어봄으로써 확인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도무지 읽어내기 어렵다면, <밤이 오기 전에>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나는 이 편이 프루스트 문학에 접근하는 훨씬 더 나은 길이라고 본다.
밤이 오기 전에 - 프루스트 단편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은이), 유예진 (옮긴이),
현암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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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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