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가족·지인 단톡방에서 함께 읽으며 서로의 속마음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던 실버 센류 모음집 책표지.
홍영미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가 주최하는 일본 '실버 센류(5·7·5조의 짧은 시)' 공모전 당선작을 모은 이 책은, 나이 듦의 비애와 해학을 단 세 줄의 문장에 담아내고 있었다. 문득 우리 가족은 이 글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가족 단톡방에 책에 실린 시 몇 구절을 올리고 물었다.
"어떤 문장에 가장 공감이 가니?"
가장 먼저 답을 보낸 것은 60대 후반의 남편이었다. 딱 하나만 고르랬더니 욕심껏 세 가지나 꼽으며 '하고 싶은 말 많음'을 숨기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로 / 스마트폰과 나를 / 부리는 아내
쓰는 돈이 / 술값에서 약값으로 / 변하는 나이
아내는 여행 / 나는 입원 / 고양이는 호텔
"나이 먹어서 할배 되면 제일 무서운 게 아내라, 밥은 얻어먹고 살아야 하니까"라며 너스레를 떨고, 술값 대신 약값이 나가는 처지를 푸념하면서도 집을 지키는 자신의 신세를 해학적으로 짚어내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들 둘을 육아하며 주부이자 엄마, 아내로 치열한 30대를 보내고 있는 딸은 의외의 시를 골랐다.
당일치기로 / 가보고 싶구나 / 천국에
'천국'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단다. 육아와 일상에 지친 30대 엄마의 눈에는 그저 '아무 근심 없이 딱 하루만이라도 쉬고 싶은 차원 높은 휴식'으로 읽혔나 보다. 씁쓸하면서도 웃픈 딸의 꿈이었다. 40대 초반 의사 사위와 60대 초반인 내가 동시에 고른 시도 있었다.
세 시간이나 / 기다렸다 들은 병명 / <노환입니다>
같은 문장을 골랐지만, 바라보는 지점은 전혀 달랐다. 사위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무기력해지면서도, 의사로서의 오만함을 자제하게 만드는 문장"이라며 청진기 너머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반면 환자의 입장에 서 있는 나는 "하루 종일 검사하고 들은 말이 '신경성입니다'일 때처럼, 모든 것이 그저 늙어감 때문이라는 말 앞에 무력해지는 내 나이가 떠올랐다"라고 답했다. 30대 초반의 막내아들은 책의 대표 제목이기도 한 시를 골랐다.
사랑인 줄 / 알았는데 / 부정맥
"아직 사랑에 설렐 나이라 그렇다"라며 웃어넘기는 아들의 청춘이 미소 지어졌다. 내친김에 늘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는 30대 후반의 조카에게도 문장을 보내보았다. 마침 오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는 조카는 이 문장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했다.
넘어질 뻔해서 / 뒤돌아봤더니 / 아무것도 없는 길
"지금의 나 같아요. 매일 주변 시선 신경 쓰면서 아등바등 사는데, 사실은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거든요. 알면서도 애쓰며 사는 제 중년의 모습 같구만요."
조카의 답장을 읽는 순간 마음이 알싸하게 짠해졌다. 남들 눈에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년도, '혼자 애쓰며 스스로를 안쓰러워할 만큼 외롭고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구나.' 문장 하나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조카의 속마음에 '더 따뜻하게 마음을 줘야겠구나' 다짐하게 되었다.
랜선으로 번진 '세 줄짜리' 공감과 위로
재미가 들린 나는 지인들과의 단톡방에도 책의 구절들을 공유하며 일종의 '랜선 독서 모임'을 열었다. 무더위에 시원하게 한번 웃어보자고 던진 짧은 글귀들이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눈에는 모기를 / 귀에는 매미를 / 기르고 있다"라는 시에 "딱 내 얘기다, 비문증과 이명의 총체적 난국"이라는 60대 지인부터, "홀딱 반했던 / 보조개도 / 지금은 주름 속"을 고르며 거울 속 낯선 누군가와 마주하는 쓸쓸함을 고백하는 50대 지인까지.
"만보기 숫자 / 절반 이상이 / 물건 찾기"라며 건망증이 치매가 될까 봐 겁난다는 하소연에는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공감했다. 한 지인은 "노환으로 다 읽기도 힘들구먼, 우째 다 적었노. 난 노안이라 암 생각이 없다"라며 유쾌한 사투리 섞인 입담으로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우리는 매일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묻고 수많은 텍스트를 주고받지만, 막상 서로의 진짜 속마음이나 삶의 무게를 깊이 있게 대면할 기회는 많지 않다. '어떻게 지내냐'는 상투적인 질문에는 '잘 지낸다'는 다짐 같은 대답만 돌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5·7·5조의 정제되고 짧은 언어들은 솔직하고 가감 없는 해학으로 사람들의 마음 문을 스르륵 열어주었다.
가스불 위에서 까맣게 타들어 갈 뻔했던 냄비에서 시작된 소동이, 가족들의 숨겨진 고충을 들여다보고, 외로운 조카의 어깨를 다독이고, 지인들과 함께 나이 듦의 고단함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소중한 기회가 된 것이다. 책의 편집후기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이를 먹는 것은 누구나 가는 길을 걷는 일입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울퉁불퉁한 길이지만, 나이를 먹었기에 보이는 풍경도 분명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을 매개로 자주 서로의 마음을 대면하고, 나누고, 삶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시간을 만들어가고 싶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혼자 걸으면 쓸쓸한 길이지만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비추며 함께 걸어간다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다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은이), 이지수 (옮긴이),
포레스트북스, 2024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