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느릅나무는 운하를 가리지 않는다

여행길에서도 결국 학교를 생각했습니다

등록 2026.08.11 11:28수정 2026.08.11 11:28
0
원고료로 응원
암스테르담 프린센흐라흐트(prinsengracht) 운하 암스테르담 거리를 걸으며 담은 사진.
▲암스테르담 프린센흐라흐트(prinsengracht) 운하 암스테르담 거리를 걸으며 담은 사진. 김순남

8,500km라는 거리가 무색해지는, 경상남도 양산의 소식이 이곳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실시간으로 닿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곳의 더위가 연일 최고 기록을 바꾸고 있다고, 그래서 양산에서는 옥수수가 팝콘이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들려옵니다.

그래도 여긴 20℃ 안팎의 기온에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있어서 노래를 흥얼거리게 됩니다. 오늘도 마냥 걷기를 즐기는데 운하 양쪽에 늘어선 느릅나무는 훌륭한 벗입니다. 나무가 건강한데도 잎이 지나치게 많지 않아 운하에서 보면 예쁜 건물을 다 가리지 않고, 건물에서 보아도 운하가 보입니다. 그렇게 나무가 욕심내지 않고 건물과 운하를 함께 볼 수 있게 해주니, 운하 물빛이 맑지 않아도 풍경이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아름답다기까지 합니다. 느릅나무에서 절제가 주는 아름다움을 배웁니다.

느릅나무 구경이 무료해지면 플라타너스가 사열을 받듯이 서 있는 길로 접어듭니다. 예쁜 카페를 지나치지 못하고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키고 앉으니, 마음이 어느새 교정으로 달립니다. 학교의 플라타너스는 50년의 세월을 사는 동안 바람에 꺾이고 속이 비는 고통을 감내했을 텐데, 무더운 여름이면 한없는 인자함으로 무릎을 내어주었겠지요.

그늘로 여름을 이겼을 제자 호, 혜, 희, 수, 진, 윤, 훈이도 이제는 50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렇게 정겨운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작년에 연락이 다시 시작된 수현(가명)이를 떠올립니다. 스스로 진학할 고등학교를 찾다가 부산의 숱한 학교를 마다하고 우리 학교를 찾아왔지요. 수현이는 성실함이 묻어났고, 야무지고 목표가 뚜렷한 학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결정을 걱정하며 말리다가 끝내는 수용하였는데, 그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를 담은 글을 보내왔습니다. 수현이의 영민함을 기뻐하며, 그를 돌보는 부모의 인자함을 보러 집을 방문하였지요. 막 피어난 국화 화분을 들고 간 기억이 있습니다.

그 수현이가 결혼했습니다. 좋은 직장을 구하고 승진도 하였다는 소식을 작년 가을에 듣고, 올봄에 결혼 소식을 들었습니다. 갈 수 없는 처지여서 전화로 축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 수현이가 여름이 되자, 다시 전화했습니다. "선생님, 학교 생각이 자꾸 나요. 고등학교,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그 시절이 저를 성장케 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보리밥 사 주신 일, 바람 쐬게 해주신 거 너무 좋았어요."

그러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장학금을 보내고 싶습니다. 후배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면 좋겠어요."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쑥스러움이 담겼지만, 살림을 막 시작하는 젊은이가 후배들을 위해 마음을 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던가요? 마음이 있더라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얼마나 어렵던가요? 이런 성장을 바라보는 일이 교사가 사는 즐거움입니다. 아득히 잊고 살았던 제자에게서 전화받는 일, 좋은 소식을 듣는 일 말입니다.

학교가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되는 요즘, 저 느릅나무의 생태를 다시 떠올립니다. 자신의 고유한 자태를 잃지 않으면서 주변을 가리지 않는 겸허함이랄까요? 아니면 배려라 할까요? 20년 전부터 안고 살았던 말이 있습니다.


"학교는 대학에 보내는 일로 다른 활동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대학을 잘 가게 돕되, 학교에 다니는 동안도 행복하게 해주자. 춤을 추는 친구들에게 무대를 마련해 주고, 드럼을 치고 싶은 친구들에게 드럼을 사 주자. 공부가 즐거운 학생도 있지만, 축구하는 즐거움 때문에 학교에 올 수도 있지." 저 말들이 아직도 살아 남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우리가 이를 실천하여 살아온 덕에, 학교를 졸업해 나간 수많은 수현이가 자기 세계에서 주인으로 살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양산신문에도 실립니다.
첨부파일 0A0A0514.jpg
#암스테르담 #교육 #느릅나무 #절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생이 책을 읽는 일을 버릇으로 만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돕도록 애써 살아보겠습니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 길가에서 '밤'을 보면 부디 외면하세요 캐나다 길가에서 '밤'을 보면 부디 외면하세요
  2. 2 반도체 앞 '시한폭탄'... 귀를 의심케 한 장관의 말 반도체 앞 '시한폭탄'... 귀를 의심케 한 장관의 말
  3. 3 세계에서 제일 무거운 앵무새... 위치 추적기를 달았더니 세계에서 제일 무거운 앵무새... 위치 추적기를 달았더니
  4. 4 누드 모델이 가운을 벗기 전에 하는 일 누드 모델이 가운을 벗기 전에 하는 일
  5. 5 사진 속에 담긴 진실... 이 대통령은 언제까지 침묵할 건가 사진 속에 담긴 진실... 이 대통령은 언제까지 침묵할 건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