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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와 밥솥 고쳐내던 엄마가 왜 이러실까

엄마는 해내는 사람이었고 나는 지켜보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뒤바뀐 역할

등록 2026.08.13 15:03수정 2026.08.1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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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 혼자 엄마집에 갔다. 사위와 손주가 다 같이 가면 아무래도 엄마는 분주해진다. 나 혼자 간다고 하면 엄마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거 같다. 그 무심함이 좋다. 70대 1인가구의 삶에 티 안나게 스며들어 관찰자가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언제 가도 깨끗한 엄마네 집


번호키를 열고 엄마를 불렀는데 답이 없다. 안방에서 혼자 에어컨 틀고 있어서 안 들리나 했는데 진짜 없다. 이미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아침부터 굶은 나는 냉장고부터 열었다. 깔끔한 반찬통 몇개, 작은 냄비의 오징어국이 보여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냉동실에 홈메이드 햇반 두 개가 나란히 있다. 얼른 데워서 뚝딱 먹었다.

속이 든든해지니 먼지 한 톨 없는 거실이 눈에 들어온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외출하기 전에 늘 집정리를 했다. 들어왔을 때 집이 깨끗해야 기분이 좋다는 이유였다. 20년 동안 출근하면서 나갈 때 현관 먼지까지 싹 닦아놓고 나가는, 어찌보면 청소 극성파이기도 했다.

 먼지 하나 없던 엄마집
먼지 하나 없던 엄마집 최은영

내 공간을 스스로 청결하게 유지하는 행위는 내 삶을 내가 여전히 주도하고 있다는 유능감을 준다.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너무 오래 침잠하지 않았던 이유도 어쩌면 이런 유능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외출 했던 엄마가 집에 들어오시더니 방에서 무슨 박스를 들고 나왔다. 다이소에 갔다가 행거가 괜찮아 보여서 샀다고 했다. 약해보이긴 하지만 얇은 여름옷 훌훌 걸어놓기 좋지 않겠냐며, 파우더룸이 작아서 복잡한데 이게 좋아보였다고 했다.

엄마집은 지방 25평 아파트로 방이 3개다. 안방에 딸린 파우더룸만 옷장으로 쓰고 나머지 방 2개는 그냥 비워뒀다. 방이 남으면 옷방을 만들법도 한데 동선 길어진다고 안방만 쓴다.


엄마는 상자를 뜯어서 설명서를 한참 보더니 나보고 이거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가 준 설명서는 보지도 않고 박스의 사진을 보며 그냥 조립했다. 손으로 하는 건 대부분 못하는 나이지만 이건 너무 쉬웠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감탄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뭐가 고장나면 다 고칠만큼 손재주 좋았던 엄마가 이런 걸로 감탄하는 게 어색했다.

"금손 엄마가 겨우 이런 걸로 감탄하면 어째. 나 없었음 어쩔라고 했대?"


엄마는 옆동 사는 이모부를 시킬 거라 했다. 선풍기와 밥솥을 고치던 엄마가 막대기 몇 개 끼우는 행거 조립을 다른 사람 시킨다니, 주책없이 순간 울컥했지만 티는 안 냈다.

역할이 바뀌는 걸 바라보는 마음

금손이었던 엄마가 이제는 간단한 조립을 남에게 맡긴다. 미세하게 자라난 엄마의 주름만큼이나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하는 빈자리가 늘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 엄마는 해내는 사람이었고 나는 지켜보는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 역할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걸 이런 사소한 순간에 확인하게 된다.

오후에 엄마와 영화를 보고 와서 저녁 먹으며 거의 두 시간의 수다를 이어갔다. 애들 방학이라 삼시세끼를 하며 간간이 운전기사 하느라 누굴 만날 시간이 없는 나와 달리 엄마는 매일 만나는 사람이 다르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게는 살아있는 일일드라마 같았다. 엄마 이야기에 장단 맞춰 주려고 넣는 추임새가 아니라, 진짜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추임새가 나왔다. 그게 재밌는지 엄마도 신이나서 별 이야기를 다했다.

혼자 사는 엄마의 일상에 살며시 스며들어 관찰자가 되었던 하루, 걱정했던 것보다 엄마는 훨씬 더 씩씩하고 다채로운 자신만의 우주를 살아가고 있었다. 늙어가는 엄마를 지켜보는 일은 때로 서글프지만 이렇게 함께 웃고 수다 떨며 온기를 나누는 시간 덕분에 내 마음도 든든하게 채워진다. 언제까지고 엄마의 가장 열렬한 관객이자 이야기를 들어주는 딸로, 엄마 곁을 느슨하고 따뜻하게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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