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7월 31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현대자동차 광고
경향신문
"국내 최초의 한국산 승용차에 붙일 차명(車名)과 심볼 마크를 모집합니다. 해외 시장에서 쉽게 통용될 수 있는 이름을..."
1974년 여름, 주요 일간신문에 대문짝만한 광고가 실렸다. 그해 가을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에 출품할 현대자동차 최초 독자 승용차의 차명 공모였다. 39일 동안 5만 8223명이 참여했고 3만 6500개의 이름이 등장했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것은 무려 887명이 제출한 '아리랑'. 휘닉스와 무궁화가 뒤를 이었다(권용주, "'아리랑' 될 뻔했던 현대차 '포니'", 한국경제TV, 2023년 5월 22일).
첫 국산 모델의 이름은 '아리랑'으로 귀결되는 듯했다.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노래고 영어 발음도 부드러웠다. 그런데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다. "어, 그런데요. 차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면 어떡합니까." 모두가 경악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가사가 그제야 머릿속에 들어온 것이다. 십 리도 못 가 퍼지는 차? 상상하기도 싫었다. 결국 아리랑은 탈락한다. 온갖 궁리 끝에 현대자동차가 믿어 보기로 한 건 응모 엽서를 정리하던 여대생들의 감각이었다. 그들은 조랑말 '포니(Pony)'를 골랐고 현대 국산 차 1호의 이름은 포니가 된다.
비록 조랑말의 발길질에 채였을망정 아리랑에 표를 던진 이들에게나 아리랑을 치워 버린 이들에게나 이 노래의 무게는 다르지 않았다. 아리랑은 구절양장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이 배우고 흥얼거리고 목청껏 불렀던 '민족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분단의 칼바람조차 이 노래는 가르지 못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재 아래 남북 단일팀 구성이 논의됐다. 남과 북은 티격태격했다. "국기는 무조건 태극기를 써야 한다"는 남한 측 주장을 북한이 받을 리 없었다. 그런데 가장 이의 없이 합의된 대목이 있었다. "단일팀의 국가(國歌)는 <아리랑>으로 한다." 남이건 북이건 거부감 없이 부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민족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4·19혁명 이후 남북학생회담이 제기됐을 때 대학생들도 "우리 민요 <아리랑>을 부르자. 이렇게 '민족의 노래'를 서로 같은 시각에 부름으로써 하늘을 통한 동족의 호흡을 잠시라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동아일보>, 1961년 5월 14일). 관련 기사가 난 이틀 뒤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한낱 미몽으로 끝났지만 노래 <아리랑>의 위상을 보여주는 예이리라.
그런데 단일팀 국가로 아리랑을 택한 데 볼멘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칼럼은 아리랑이 "민족의 얼을 담뿍 실은 국민가요"임은 인정하면서도 남북 선수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가사를 부른다면 "좀 해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동아일보>, 1963년 1월 26일). 사실 좀 웃기지 않는가. 올림픽 금메달을 따서 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니.
가장 큰 공헌자는 춘사 나운규

▲ 나운규가 주연한 영화 <아리랑>(1926년)의 한 장면
퍼블릭 도메인
기실 노래 아리랑의 종류는 많았다. 지역마다 있었고 동네마다 가사와 곡조가 달랐다. 1924년에는 "'아리랑 타령'이 전 세계에 퍼져 모든 사람의 노래되기를 바란다"는 기원이 신문에 실리기도 한다(<동아일보>, 1924년 11월 10일). 이 다양한 아리랑의 대표 선수(?)를 만들어 대중의 입에 올린 가장 큰 공헌자는 영화감독 춘사 나운규(1902~1937)였다.
1926년 10월 1일, "동양 최대의 석조건물"이라는 조선총독부 낙성식이 열렸다. 조선의 지배자가 일본임을 과시하는 상징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종로 단성사에서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됐다. 영화는 장안의 화제가 됐고 몰려드는 관객 때문에 극장 문짝과 유리창이 부서질 지경이었다. 나운규가 각본·감독·주연까지 맡은 영화의 주인공 김영진은 만세운동의 충격으로 미쳐 버린 청년이다.
여동생을 겁탈하려는 지주의 마름을 죽인 뒤 실성에서 깨어난 그는 순사에게 끌려가며 말한다. "여러분 울지들 마십시오. 이 몸은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인 것이올시다." 그가 고개 너머로 끌려갈 때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우리가 100년 동안 부르게 되는 <아리랑>의 원형이었다.
나운규는 영화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조선 정서"를 담는 동시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는 것을 암시하려 했으며, 조선 사람들의 "의협하고 용맹"한 패기를 살리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나운규, "<아리랑>과 사회와 나", <삼천리>, 1930.7. -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에서 재인용).
그럼 이 아리랑은 어디서 왔을까. 나운규는 고향 회령에서 어린 시절 철도를 놓으러 온 남쪽 노동자들이 "아리랑 아리랑" 하며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훗날 서울에서 그 멜로디를 되살리고 가사를 보태 단성사 음악대에 곡보를 부탁했다. 즉 나운규는 수천만 남과 북의 사람들이 부르게 될 아리랑을 다듬어 후세에 남겼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서 조선은 일본 땅임을 살천스레 과시하던 날, 조선인들의 거리 종로통에서는 한국인의 가슴을 뒤흔든 영화와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구슬프게 태어났다. 재미있고도 의미심장한 우연 아닌가.
관객들은 고개 넘어 끌려가는 조선 청년을 보며 통곡했고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어떤 이들은 "문전옥답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말인가"라는 가사를 부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슬픔에 분노가 덧붙으면 없던 용기도 생겨나는 법이다. 아리랑은 일본 경찰이라면 듣기만 해도 몸이 경직되는 말과도 연결됐다. "조선 독립 만세!"
희망의 숨구멍 같은 노래

▲ 1926년 10월 3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아리랑> 광고
한국연구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네"라는 가사는 버리고 가는 이에 대한 가벼운 저주만은 아니었다. 같이 가겠다는 의지였고 버림받지 않겠다는 각오였고, 우리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지배자들에 대한 일격이기도 했다.
중국 옌안에서 미국 여기자 님 웨일스를 만난 독립운동가 김산은 말했다.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김산·님 웨일즈, <아리랑>, 송영인 옮김, 동녘, 1984). 김산의 인생 굽이굽이에는 노래 아리랑이 피멍울처럼 맺혀 있었다.
김산은 전투에서 패한 후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가까스로 피운 모닥불 옆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자신을 체포해 가는 일본 경찰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날 나오는 노래는 아리랑밖에 없다."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심리적 고통 속에서도 그는 또 아리랑을 불렀다. 패배의 노래이자 절망의 심연에서 발가락 끝에 닿는 바닥 같은 노래, 희망의 숨구멍 같은 노래였다. 이 노래가 어디 김산에게만 그랬을까.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죽을 고생을 하던 이들은 밥 덩이와 단무지 앞에서 눈물지으며 아리랑을 불렀고, 오키나와 도카시키섬의 위안부들은 무시무시한 폭격 속에서 아리랑을 울부짖으며 공포를 달랬다. 나라를 떠나며, 해외로 끌려가며 아리랑을 불렀지만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도 아리랑을 부르며 어깨춤을 췄다.
1975년 유제두가 일본의 복싱 영웅 와지마 고이치를 때려눕혔을 때 링사이드의 재일교포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울었다.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남북 단일팀이 중국의 만리장성을 통쾌하게 넘었을 때도 조총련이고 민단이고 남이고 북이고 아리랑을 목메어 부르다가 눈물콧물을 쏟았다.
2002년 월드컵에서는 한국인들이 아리랑을 3박자가 아닌 4박자로 바꿔 부르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절망할 때나 희망을 찾을 때나 언제 불러도 발에 잘 맞는 신처럼 들어맞는 노래, 그게 아리랑이었다.
나라가 없어도 불렀고 나라를 되찾아서도 불렀다. 패배해서도 불렀고 승리해서도 불렀다. 그래서 <아리랑>은 100년 동안 희미해지지도 않았고 흘러간 옛 노래가 되지도 않았다. 어쩌면 우리 현대사 자체가 길고 긴 아리랑 고개였는지도 모른다. 울며 넘은 고개, 어깨춤 추며 넘은 고개 그 굽이굽이마다 아리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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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6500개 후보 중 현대의 첫 차가 될 뻔했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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