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식 12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열린 ‘고 이범영 의장 32주기 추모식 및 국민훈장 모란장 헌정식'에 참여한 시민민단체 인사들
고창남
뜨겁다 못해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 속에서도 마석 모란공원의 풀벌레 소리는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32년 전, 1994년 8월 12일도 대한민국 기상 관측 이래 손꼽히는 지독한 더위가 몰아쳤던 날이었다. 30대의 젊디젊은 나이에 담도암으로 세상을 떠난 '청년운동의 야전사령관' 고(故) 이범영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및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 의장.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서른두 해가 흐른 2026년 8월 12일 오전 11시,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내 이범영 의장의 묘소 앞에는 그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동지들과 가족들이 다시 모여섰다.
이날 추모식은 예년과 달리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바친 공로를 인정받아 고인에게 추서된 '국민훈장 모란장'을 묘소 앞에 바치는 헌정식이 함께 열렸기 때문이다.
민청련과 한청협 등에서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은 물론, 장영달 전 국회의원, 이래경 국민주권전국회의 상임의장, 이기동 전 한청협 부의장 겸 부산경남청년단체협의회 의장, 이원영 한양대 교수, 양춘승 (사)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등 시대의 거친 파도를 함께 넘어온 선후배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한스런 맹세..."

▲제창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시민단체 인사들
고창남
뙤약볕이 내리쬐는 묘역에 묵직하고 단단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서른두 번째 추모식의 막이 올랐다.
"국가보안법의 벽을 넘어... 마침내 인정받은 헌신의 삶"
사회를 맡은 이원영 한양대 시민사회학과 교수는 서두에서 이번 국민훈장 추서 과정에 얽힌 우여곡절을 회고했다.
이 교수는 "32년 전 1994년 여름도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올해 여름은 그때보다 더 뜨겁다"며 "그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우리들의 오랜 열망을 담아 올해 이범영 동지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게 되었다"고 전했다.
사실 이범영 의장에 대한 정부 훈장 신청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훈장 추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통해 매년 추천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매번 심사 막바지 단계에서 '국가보안법' 저촉 이력이 발목을 잡았다. 모란장 수여는 시대의 비극과 국가보안법이라는 족쇄가 비로소 사라지고, 마침내 국가가 그의 헌신을 공식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장영달 인사말을 하는 장영달 전 국회의원
고창남
장영달 전 의원 "민주화 운동은 영원히 하는 것... 이범영 정신 계승해야"
이어서 민청련 창립을 함께했던 장영달 전 국회의원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장영달 전 의원은 1983년 민청련 창립 당시의 일화를 생생히 증언했다.
"이범영 동지와의 만남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결성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1981년에 출소했기 때문에 그전 활동가들과는 교류가 없었습니다. 당시 민청련을 결성하며 김근태 의장과 저를 비롯한 1기 집행부의 임무는 9월 30일 창립선언문 낭독과 만세 삼창까지만 하고 구속되는, 이른바 '감옥 가는 조'였습니다. 반면 이범영, 김병곤 동지 등 후배들로 구성된 2기 집행부는 1진이 구속된 이후 본격적인 투쟁 전선에 나서기 위한 조직이었습니다."
장 전 의원은 남산 안기부 지하실로 끌려가 매를 맞으며 취조받던 시절의 아찔했던 경험도 털어놓았다.
"저희가 남산에 끌려가 열흘 정도 가혹행위와 심문을 받던 때의 일입니다. 당시 학생들이 연달아 체포되어 수감되면서 서대문형무소가 수용 인원을 초과해 포화 상태에 이를 지경이었습니다. 안기부에서 우리에게 '학생들이 이렇게 계속 들어오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고 물어왔습니다. 이에 우리는 '전두환 정권이 안정되었다면서 언제까지 사람들을 잡아둘 거냐. 정말 체제가 안정되었다면 다 풀어주고 학생들이 데모를 하든 마냥 내버려 두어야 할 것 아니냐'고 당당하게 요구했습니다. 저희 얘기가 무슨 약발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해 연말인가 다 풀었어요. 그리고 84년 들어가면서부터 유화국면으로 들어갔지요."
이어 장 전 의원은 경기대학교 입구 계단에서 대중 시위를 정열적으로 리드하던 이범영의 모습을 회상하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교훈을 강조했다.
"서대문에 있는 경기대학교 입구에 있는 계단에서 행사들을 많이 했는데, 거기서 이범영 동지가 리드하고 하는 모습을 많이 기억합니다. 오늘날 그래도 국가가 늦게나마 이범영 동지의 투쟁사를 인정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늘날의 사회 현상을 보면 '민주화 운동은 뭐 끝나는 게 없는 거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다시 자각하게 됩니다. 이범영 정신이 이제 후손들에게 자꾸 번지면서 '민주화 운동은 끝이 있는 게 아니다', '민주화 운동은 영원히 하는 것이다'라는 교훈을 가지고 우리도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 역할을 하고 후손들에게 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양춘승 인사말을 하는 양춘승 (사)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고창남
양춘승 상임이사 "70이 넘어 느끼는 그리움과 무력감... 그래도 힘을 내야"
서울대 농법회 1년 후배이자 평생을 동지로 살아온 양춘승 (사)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는 마이크를 잡고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회고를 이어갔다.
"미리 얘기를 하지, 그래야 무슨 연설문이라도 만들지..."라고 농담삼아 운을 뗀 양 상임이사는 대학교 시절 이범영이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미친 삶의 궤적을 이야기했다.
"사실 여러분도 다 그렇지만 우리가 뭐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는 게 있었겠습니까. 대학 와서 제정신 들기 시작한 거지요. 저는 대학교 와서 이 형과 친구들 이렇게 매주 토요일 날 가서 어머니한테 국수 얻어먹고 하면서 또 토론하고, 지금까지 제가 살면서 생각하는 방식이나 골격을 만들어 주는 시기를 같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갔어요. 그래서 사실은 기분이 되게 안 좋았습니다. 여기 올 때마다 불편했고... 그런데 오늘 와서 보니까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그리움 같은 걸 느끼더라고요."
양 이사는 일찍 세상을 떠난 형에 대한 안타까움과 최근 시국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찾아와 보니 왜 이리 보고 싶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70세를 훌쩍 넘기며 드는 나이 탓의 센티멘탈한 감정일 수도 있겠지요. 일찍 와서 김근태 형부터 묘역들을 쭉 둘러보고 나니, 묘한 죄책감과 무력감이 밀려오는 것 같습니다. 윤석열이라는 괴물을 탄핵하고 찾아왔건만, 지금의 현실을 보면 여전히 심각하게 아쉽고 시원찮은 부분들이 많습니다.
훈장을 받은 기쁜 자리에서 이런 우울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32년 전에 떠난 이 형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저의 진솔한 하소연입니다. 나이는 먹었어도 어쩌겠습니까, 다시 힘을 내야지요. 장영달 형님도 힘을 내자고 하시는데, 저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저도 있는 힘껏 살아가겠습니다. 형님, 이제 기분 좀 좋아지셨습니까? 늦게나마 훈장 받으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그간 고생 많으셨던 형수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기동 인사말을 하는 이기동 전 한청협 부의장
고창남
이기동 전 한청협 부의장 "주역을 붙들고 씨름하던 형... 사람 냄새 나는 삶의 가치"
진주에서 전날 밤 올라와 남양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참석했다는 이기동 전 한청협 부의장은 지리산 시절 이범영 의장과의 깊은 인적 교류를 회고했다.
"진주 민청 회원이 마침 지리산 근처에 새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요양하기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지리산 시대가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때 형님하고 제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형수님이야 속이 타든 어찌 됐든 간에, 형은 만나면 맨날 나라 걱정만 했습니다. 근태 형은 만나면 미안하다고 했는데, 범영이 형은 '내가 사람 볼 줄을 몰랐다'며 자책을 많이 하더라고요. 우리 직업이 원래 사람 사업 하는 직업이지 않습니까."
이 부의장은 이범영 의장의 철학적 고민과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어느 날 가보니까 형님이 주역을 공부하시더라고요. 사회과학도였던 제 생각에는 형이 주역 따위를 왜 보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까 이제 살 만해지고 내일모레 70이 가까워지니 알겠더라고요. 몸은 자책하며 갇혀 있을지라도, 세상을 좀 더 크게 넓고 깊게 이해하기 위해 투쟁 서적이 아니라 주역을 붙들고 씨름하셨던 그거를 이제는 좀 알 것 같습니다."
그는 이어 투쟁의 거창함 뒤에 가려져 있던 가족들의 노고와 삶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국가가 주는 이 훈장은 형수가 받았고 우리 모두가 받았고 특히 홀로 두 아이(건혜, 승민)를 키워내며 버텨온 가족들의 몫입니다. 어머니는 데모하는 자식과 친구들이 찾아와도 라면을 끓여주고 밥을 해주셨습니다. 거창한 국가와 민족 과제도 있지만, 생활 속에서 사람 냄새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우리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조금씩이라도 고쳐나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다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설이 인사말을 하는 김설이 여사(고 이범영 의장의 부인)
고창남
유가족 김설이 여사 "여러분 모두가 이미 이범영에게 훈장을 주셨습니다"
동지들의 추모사에 이어 고 이범영 의장의 부인 김설이 여사가 단상에 섰다. 김 여사의 담담하면서도 진심 어린 인사는 현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지난 6월에 이범영씨가 훈장을 받았는데 제 생각 외로 저희 아버님이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님은 평생 외아들 하나 바라보시면서 웃을 새도 있으셨겠지만 우는 날이 더 많으셨습니다. 한 5~6년 전부터 치매를 앓으시느라 지금도 가끔 아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들이 형사한테 쫓겨 도망 다니고 있다가 몰래 와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갔다'고 하십니다. 치매가 심해지면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 어머니도 훈장을 보시고 잠깐 동안이나마 눈시울을 붉히시며 좋아하셨습니다."
김 여사는 정부의 훈장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지난 32년간 이범영의 곁을 지켜준 동지들의 마음이었다고 고백했다.
"이래저래 제가 이 훈장을 받고 생각을 해보니, 국가에서 주는 이 훈장보다 훨씬 오래전에 이범영 씨와 함께했던 모든 선후배님들, 친구분들이 이미 이범영씨한테 훈장을 주셨더라고요. 그리고 그 훈장에 덧붙여 부상까지 주셔서 저희 세 모녀가 그동안 살면서 큰 울타리가 돼 주셨습니다. 덕분에 살아오면서 제 삶이 누추하지 않았고, 남한테 거북살스럽게 손 내밀지 않아도 됐고,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 여사는 정겨운 유머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이범영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러분한테 점심 대접을 할 거예요. 살아생전에는 누구한테 대접을 한다든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받아서 먹기만 하고 쓰기만 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점심을 준비했다고 하니 같이 점심 한 끼 하시길 바랍니다."

▲이원영 사회를 보는 이원영 한양대 시민사회학과 교수
고창남
이에 사회를 보던 이원영 교수가 "살아계실 때 사기도 많이 샀습니다!"라고 좌중에 웃음을 안기자, 김 여사는 "나한테 산 건 안 샀어, 알고 있어요"라고 받으며 좌중을 웃음짓게 했다. 이 교수가 "뜯기도 엄청 뜯었습니다"라며 농담을 건네자, 김 여사는 최근 한 후배가 찾아와 '형님이 살아계셨으면 몇 배, 몇십 배를 줬을 것'이라며 봉투를 주고 간 일화를 들려주며 "그 말을 듣고 마음의 부담이 싹 없어졌다. 항시 오래비처럼 챙겨준 장영달 형님을 비롯해 여러모로 고맙다"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관악의 횃불에서 민주화의 버팀목으로... 이범영이 남긴 유산
추모식 공식 순서는 민중가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다 함께 제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참석자들은 이범영 의장의 묘소에 헌화하고 분향하며 참배를 마쳤다.

▲국민훈장 모란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받은 고(故) 이범영 의장
고창남
고(故) 이범영 열사는 1955년생으로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76년 12월, 박석운·백계문 동지와 함께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며 500여 명의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 이 사건은 언론 통제로 국내에는 보도되지 못했으나 일본 아사히신문 등에 전면 보도되며 멈춰 선 학생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그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집행국장과 의장을 거쳐 6월 항쟁 이후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 및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 의장을 맡아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투쟁 속에서 얻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94년 8월 12일, 담도암으로 인해 40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영면했다.
32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서야 그의 묘소에 바쳐진 국민훈장 모란장. 그것은 단순한 금빛 징표가 아니라, 국가의 불의에 맞서 청춘과 목숨을 던졌던 한 청년 운동가에 대한 뒤늦은 헌사이이자, "민주화 운동은 영원히 하는 것"이라는 장영달 전 의원의 말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시대의 이정표였다.

▲이호봉 아들의 훈장증을 받아 안은 고(故) 이범영 민청련 및 한청협 의장의 아버지 이호봉 어르신
김설이 여사 제공
묘역을 내려오는 길, 마석 모란공원 산자락에 내리쬐는 뙤약볕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동지들이 함께 부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의 여운은 가슴 깊은 곳에 서늘하고 단단한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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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철도청 및 국가철도공단, UNESCAP 등에서 약 34년 공직생활을 하면서 틈틈히 시간 나는대로 제 주변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온 고창남이라 힙니다. 2022년 12월 정년퇴직후 시간이 남게 되니까 좀더 글 쓸 수 있는 시간이 되어 좀더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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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범영 의장 32주기 추모 및 국민훈장 모란장 헌정식... "민주화 운동, 영원히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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