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을 적는 칸이 인성을 만들지는 않는다

등록 2026.08.13 16:20수정 2026.08.1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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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생활기록부에는 학생의 인성을 적는 칸이 있다.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줄여서 행발이라 부른다. 담임교사가 1년간 관찰한 품성과 태도를 서술하는 자리이고, 학생부종합전형에서 오랫동안 인성 평가의 핵심 자료로 쓰여 왔다. 점수만으로 사람을 뽑지 말자는 것, 성적 바깥의 인간적 면모를 함께 보자는 것. 취지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이 칸에 열심이었던 교사다. 나는 담임을 맡은 반에서 매주 학급에서 모범학생 투표를 했다. 한 달치를 모아 5위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생기면 그때그때 적어 두었다.

수학여행 버스에서 혼자 앉게 된 아이를 위해 자리를 바꿔 준 학생, 친구 생일을 챙기다가 다른 아이의 생일이 그냥 지나간 것을 알고 조용히 나에게 귀띔해 준 학생. 그런 것까지 다 모았다. 학년 말이 되면 그 축적 위에서 문장이 나왔다. 근거 없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지금도 그 투표 자체가 잘못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하다고 본다. 남을 배려하는 행동은 대개 조용히 이루어지고, 조용하기 때문에 사라진다. 누군가의 선행이 공적인 자리에서 이름을 얻는 경험, 반 전체가 그것을 함께 확인하는 경험은 교육적으로 값지다. 사람은 인정받은 행동을 반복한다.

문제는 그 인정이 어디서 끝나느냐에 있었다. 또래의 인정과 스스로의 뿌듯함, 보상은 거기서 완결되어야 했다. 좋은 일을 하면 마음이 좋고 친구들이 알아준다는 것, 보상회로가 여기서 닫힐 때 바른 인성이 자란다. 그런데 교실에서 받은 인정이 학년 말에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이 3년 뒤 대학에 제출된다.

선행은 그 자체로 완결되는 대신 어딘가로 흘러가는 통로를 얻었다. 통로가 생기는 순간 행동의 의미는 조금씩 달라진다.

오염은 아이들 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나부터 그랬다. 내가 매주 투표를 돌리고 순위를 정리한 이유 중에는, 학년 말에 채워야 할 칸을 미리 의식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무엇을 근거로 쓸 것인가. 좋은 마음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 좋은 마음 옆에 업무의 필요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나는 두 가지를 끝까지 구분하지 못했다. 인성을 길러 주려는 프로그램과 인성을 증명해 두려는 자료 수집이 하나의 활동 안에 섞여 있었다. 이것이 지금 행발이 놓인 자리다.

투표를 집계하고 순위를 정리하고 장면을 기록하는 데 쓴 시간은,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 옆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학급 전체의 좋은 순간을 남기는 일에 성실했지만, 그 성실함이 가장 어려운 한 명에게 갔어야 할 몫을 조금씩 덜어 냈을지도 모른다.


옆 반은 더 마음에 걸렸다. 내 반 아이들은 그런 기록을 가졌고, 다른 반 아이들은 갖지 못했다. 그 차이는 아이들의 인성 차이가 아니라 담임 차이였다. 대학이 담임 간 편차를 감안해 읽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감안한다는 말이 기록을 가진 쪽에 유리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아니다.

기록이 없는 사람에게는 감안할 대상 자체가 없다. 내가 공들여 쓴 문장은 우리 반 아이에게 자산이 되었고, 동시에 다른 반 아이에게는 상대적 결핍이 되었다. 교사의 성실함이 학생 사이의 불평등을 만들어 내는 구조라면, 그것은 성실함을 권장하는 제도가 아니라 성실함에 책임을 떠넘기는 제도다.

여기에 최근의 변화가 겹친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담임이 학급 단위로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은 조회와 종례 정도로 줄었다. 관찰할 시간을 제도가 걷어 갔는데, 관찰했음을 전제로 한 기록은 그대로 남았다.

그 공백은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학생이 써 온 문장, 학부모의 요청, 담임이 학급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낸 데이터다. 자기소개서는 폐지되었지만 그 기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사의 손을 빌려 되살아났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애초 목적을 이루고 있는가. 제도의 타당성은 취지가 아니라 결과로 검증된다. 행발이 인성을 가려내는 장치라면, 그 기록으로 선발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지난 20여 년간 목격해 온 것이 학벌 서열의 견고한 재생산과 지역에 대한 노골적인 구분 짓기였다면, 이 검증은 통과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해는 피하고 싶다. 특정 개인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투표에서 상위권에 들었던 학생들의 진심을 믿는다. 수도권을 택하고 특정 진로를 피하는 선택도 마냥 나무랄 일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삶의 조건을 따라 움직인다.

몇 해 전 생활기록부에 적힌 문장과 지금의 합리적 선택이 어긋난다면, 그것은 개인의 이중성이 아니라 기록할 때 요구되는 답과 살아갈 때 유리한 답이 서로 다르도록 설계된 사회의 문제다. 아이들에게 그 간극을 개인의 진정성으로 메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인성 기록이 의미를 가지려면 인성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먼저다. 지역과 계층의 격차를 줄이는 일, 수도권 쏠림을 완화하는 일, 무엇보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도 존중받으며 살 수 있다는 사회적 보장.

그런 것들이 갖춰질 때 학생은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어서 남을 배려한다. 보상 회로가 교실 안에서 닫힐 수 있게 된다. 그때 비로소 교사의 기록은 연출의 채증이 아니라 성장의 증언이 된다.

행발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아끼는 학생에게 진심을 담아 남긴 문장이 그 아이의 어떤 시기를 지켜 주었다는 경험을, 나를 포함해 많은 교사가 갖고 있다. 다만 지금은 격려의 문장과 선발의 자료가 같은 칸에 들어 있다. 진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 칸을 선발에서 떼어 낼 필요는 없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인성은 줄 세울 대상이 아니라 문턱의 문제다. 학교에서 3년을 큰 문제 없이 보냈다면 그것으로 기본은 증명된 것이라고 사회가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상을 학생에게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동안, 우리가 실제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배려의 연출법이다.

아이들의 좋은 순간, 좋은 기억이 어딘가로 제출되는 자료가 아니라, 그 아이에게 직접 건네는 위로와 격려로 남기를 바란다.
#학교생활기록부 #입시 #인성교육 #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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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혐오의 논리를 넘어서 개인의 입장이 모두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현직교사로서 교사노조연맹, 부산교사노조, 중등교사노조의 일원으로서 공교육정상화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사노동조합연맹 대의원 -중등교사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부산교사노동조합 대변인 겸 부위원장 -부산 기장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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