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추모 공간 화장 직전 가족들과 미소가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공간
이종범
지난 8월 11일까지 우리 집에는 스무 살 뽀돌이와 열다섯 살 미소가 함께 살았다.
둘 다 언제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많았지만, 우리 부부의 걱정은 늘 뽀돌이 쪽으로 먼저 향했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도 마음에 걸렸지만, 보행기에 몸을 의지한 채 힘겹게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볼 때면 아침에 눈을 뜬 것만으로도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가족은 조만간 찾아올 이별의 순서를 이미 정해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섯 살 어린 미소가 조금 더 오래 우리 곁에 있어줄 거라는, 특별한 근거도 없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서가 바뀌고 말았다.
8월 11일 아침, 나는 오전 강의가 있어 7시 즈음 집을 나섰다.
오전 9시쯤 아내는 미소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서둘러 병원에 데려가려고 미소를 품에 안고 집을 나서는 순간, 미소가 큰 숨을 한 번 내쉬더니 몸에 힘이 빠지듯 축 늘어졌다.
놀란 아내는 그 자리에서 심장 마사지를 했지만 미소는 다시 숨을 쉬지 않았다. 내가 집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침, 미소는 오랫동안 자신을 안아주고 돌봐준 아내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두 달 동안 미소는 많이 아팠다. 오래전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고 귀도 들리지 않았지만, 익숙한 집 안에서는 냄새와 감각을 따라 나름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두 달 전부터 몸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지면서 기존에 먹던 심장약에 레나메진과 철분제, 인흡착제가 하나둘 더해졌고, 집에서 수액과 조혈주사까지 놓아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와 엑스레이, 초음파검사를 받았다. 심장과 신장에 문제가 있는 데다 방광 염증과 호흡 곤란, 빈혈까지 겹쳐 어느 하나가 나아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치료를 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의 하루도 미소의 약 먹이는 시간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가장 힘든 일은 먹기 싫어하는 미소에게 음식과 약을 먹이는 일이었다. 뽀돌이를 보행기에 올려놓은 뒤 나는 미소의 몸을 잡고, 아내는 약을 먹였다.
"미소."
처음에는 달래듯 이름을 불렀지만 약을 자꾸 뱉어내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고, 삼킬 때까지 입을 잡고 있기도 했다. 살리려면 먹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특히 레나메진은 더 힘들었다. 어렵게 입에 넣어도 혀로 밀어내며 뱉어버리기 일쑤였고, 겨우 먹였다고 마음을 놓았다가 한 시간쯤 뒤 토해버리면 나와 아내는 허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또 토했네. 큰일이네. 미소가 약을 먹어야 사는데…."
그때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미소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 먹일 시간이 되면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었다. 약을 먹이고 요람에 눕혀주면 지친 듯 금세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정말 미소를 위한 일인지, 힘들어하는 아이를 우리가 보내기 싫어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치료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약을 먹이고 수액을 놓으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소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한다고 했을까.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 질문이 떠나질 않는다.
미소가 떠난 그날, 우리는 바로 장례식장으로 데려갈 수 없었다. 아내는 미소가 좋아하던 요람에 눕혀놓고 한참을 쓰다듬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빗어주며 대답할 리 없는 아이에게 말을 걸다가 울고, 눈물을 닦고 다시 머리를 만져주다가 또 울었다.
살아 있을 때는 약을 먹이려고 붙잡고 주사를 놓느라 몸을 만졌는데, 이제는 그저 쓰다듬고 바라보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아내는 하루라도 더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열다섯 해를 한집에서 살았는데 숨이 멎었다는 이유로 몇 시간 만에 보내야 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도 딸도 같은 마음이어서 장례를 하루 미루기로 했다.
그날 저녁 미소의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 작은 묶음으로 만들어 담아두었다. 그리고 미소가 입던 옷과 장난감, 좋아했던 간식도 챙겼다. 마지막 가는 길에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낸 흔적과 좋아했던 것들을 곁에 두어주고 싶었다.
다음 날 오후, 미소의 배 쪽 피부가 푸르게 변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그래도 조금 더 곁에 두고 싶어 했지만 딸이 조용히 말했다.
"엄마, 미소 예쁜 얼굴일 때 보내주자."
그 말을 듣고서야 아내도 마음을 돌렸다.
8월 12일 밤 9시, 우리는 마지막 장례 시간에 맞춰 경기 광주에 있는 반려동물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뽀돌이도 함께였다. 집에는 아흔셋 되신 아버님이 계셨지만 보행기에 의지하는 뽀돌이를 혼자 맡겨둘 수 없었다. 요즘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일이 잦아 곁에서 바로 잡아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수면 안정제를 먹이고 데려갔는데, 다행히 오랜 시간 편안하게 잠들어 있어 우리는 미소의 마지막 길을 온전히 함께할 수 있었다.
그날은 미소를 품에 안고 집을 나서는 것도, 차 안에서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머리를 쓰다듬고 이름을 부르는 것도 모두 마지막이었다.
그래서인지 화장로로 들어가기 전 추모공간에서도 우리는 계속 미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안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소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우리 부부의 하루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우리 손길을 기다리는 스무 살 뽀돌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밥을 챙기고 수시로 기저귀를 갈고 매일 수액을 놓아야 했다. 밤이면 보행기에서도 자주 소리를 질러 우리 부부는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얼르고 달랜다.
미소를 보내고 돌아온 뒤에는 별일을 하지 않다가도 문득 눈물이 난다. 뽀돌이를 돌보다 미소 생각이 나서 울고, 그러다가 뽀돌이가 소리를 내면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난다. 길을 걷다가 산책하는 흰색 푸들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따라간다.
특히 아내가 걱정이다. 미소를 생각하며 울다가도 뽀돌이를 챙겨야 하고, 뽀돌이 곁에 앉아 있다가도 문득 미소의 빈자리를 느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미소가 떠난 뒤 우리 부부가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도 마지막 두 달이다.
열다섯 해를 함께 살았으니 좋았던 기억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주사기로 음식물을 먹이고, 약을 뱉어내는 아이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어렵게 먹인 것을 다시 토해버리던 장면들이 더 자주 떠오른다.
"그렇게 약을 싫어했는데, 이렇게 갈 줄 알았으면 그냥 편하게 해줄걸."
아내가 요즘 자주 하는 혼잣말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한다. 그때는 미소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약을 먹이지 않으면 더 빨리 나빠질 것 같았고, 처방받은 약과 수액, 주사를 제때 챙기는 것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막상 미소가 떠나고 나니 그때 했던 일들이 마음에 걸린다. 조금 덜 먹였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싫다고 뱉어내는데 목소리까지 높일 필요가 있었을까. 작은 몸으로 매주 병원에 가서 피를 뽑고 검사를 받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요즘 우리 부부의 대화에는 자꾸 '그때'라는 말이 붙는다.
"그때 조금만 일찍 병원에 갔으면 달라졌을까."
"약을 좀 더 천천히 먹였으면 덜 힘들었을까."
"처방식 말고 미소가 좋아하는 것을 실컷 먹게 해줄걸."
무엇이 미소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때의 우리는 살리고 싶어서 그렇게 했고, 지금의 우리는 떠나보낸 뒤라서 다른 선택을 생각한다.
미소와 함께한 시간은 열다섯 해인데 우리 가족의 기억은 아직 마지막 두 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잘 먹고 집 안을 돌아다니던 모습보다 먹지 못하던 미소가 먼저 생각나고, 편안하게 잠자던 모습보다 약을 뱉어내던 얼굴이 더 선명하다. 미소의 열다섯 해가 그 두 달뿐이었던 것은 아닌데 말이다.
우리 집에 처음 왔던 날 작은 몸으로 집 안을 돌아다니던 미소, 현관 앞에서 가족을 기다리던 미소,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게 된 뒤에도 익숙하게 계단을 밟아 내 침대까지 올라오던 미소, 아침이면 내 얼굴을 핥아주던 아이가 미소였다.
그런데 아직은 그런 모습보다 아팠던 마지막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아내도 딸도 나도 집 안에 남아 있는 미소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때 이야기를 반복한다.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미소를 보내는 중이다.
그래도 지금은 미안하면 미안한 대로, 보고 싶으면 보고 싶은 대로 조금 더 울어도 될 것 같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약을 뱉어내던 미소보다 현관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미소를, 힘없이 누워 있던 모습보다 아침마다 내 얼굴을 핥아주던 미소를 더 많이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장례식장에서 칸막이 유리 너머로 우리 집 꼬맹이 미소가 화장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날은 딱 거기까지였다. 더는 따라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 하나가 우리 앞에 그어져 있었다. 열다섯 해를 품에 안고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함께 갈 수 없었다.
칸막이 유리창 너머의 미소는 그렇게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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