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관리에도 '학문적 독립'이 필요하다

[주장] 비가 많이 오는 나라가 왜 비가 적게 오는 나라의 물관리를 따라야 하나

등록 2026.08.15 15:29수정 2026.08.1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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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B 본부에 소개된 ‘아시아·태평양식 물관리’ 2026년 8월 12일 필리핀 마닐라 아시아개발은행(ADB) 본부의 대형 화면에 필자의 발표를 알리는 안내가 나오고 있다. 이날 필자는 ‘From Rainfall to Resilience: An Asia-Pacific Approach to Water Security’를 주제로, 몬순지역의 특성을 살린 빗물관리와 분산형 물관리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ADB 본부에 소개된 ‘아시아·태평양식 물관리’ 2026년 8월 12일 필리핀 마닐라 아시아개발은행(ADB) 본부의 대형 화면에 필자의 발표를 알리는 안내가 나오고 있다. 이날 필자는 ‘From Rainfall to Resilience: An Asia-Pacific Approach to Water Security’를 주제로, 몬순지역의 특성을 살린 빗물관리와 분산형 물관리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한무영

지난 12일, 광복절을 사흘 앞두고 나는 필리핀 마닐라의 아시아개발은행(ADB) 본부에서 물 관련 전문가들을 만났다. '강우에서 회복탄력성으로: 물 안보를 위한 아시아·태평양의 접근법'을 주제로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ADB 건물에 들어서자 곳곳의 대형 화면에 이날 세미나 안내가 떠 있었다. 화면에는 내 사진과 함께 발표 제목이 크게 적혀 있었다. 현장과 온라인으로 참석한 물 전문가들에게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비가 많이 오는 나라가 왜 비가 적게 오는 나라에서 만들어진 물관리 방법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가?"

발표를 마치고 며칠 뒤 광복절을 맞으면서 이 질문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81년 전 나라의 독립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학문에서는 어떠한가. 세계의 지식을 열심히 배우는 것을 넘어, 이제는 우리 땅과 기후를 우리 눈으로 바라보고, 우리에게 맞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해답을 만들어 세계에 제안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이것을 '학문적 독립'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연조건이 다르면 물관리도 달라야 한다

아시아·태평양에는 몬순기후 지역이 많다. 비가 적어서 문제가 되는 곳도 있지만, 많은 지역에서는 특정 계절에 비가 집중된다. 한꺼번에 많은 비가 내려 홍수가 난 뒤 몇 달 지나지 않아 물 부족을 걱정하기도 한다. 이런 자연조건에서 살아온 아시아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나름의 물관리 방법을 만들어왔다. 비가 많이 올 때 물을 모아두었다가 건기에 사용했고, 논과 연못, 저수지에 물을 담았으며, 땅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물을 빨리 내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붙잡아두고 천천히 이용하는 방법을 생활 속에서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물관리의 많은 이론과 기술은 우리와 자연조건이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댐을 만들고, 멀리 있는 수원에서 물을 가져와 큰 정수장에서 처리한 뒤 긴 관로를 통해 공급하는 중앙집중형 시스템은 인류의 위생과 도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도 그 기술을 배우면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것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연조건이 다른데 물관리의 해답까지 똑같아야 하는지는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학문적 독립'이라는 표현은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외국의 학문과 기술을 배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좋은 지식과 기술은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졌든 배워야 한다. 그러나 배우는 것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다르다. 비가 적은 지역에서 만들어진 물관리 기술이라면 그것이 비가 많이 오는 몬순지역에서도 가장 적합한지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 지역에는 얼마나 많은 비가 오는가. 언제 집중되는가. 내린 비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 선조들은 그 비를 어떻게 모으고 이용했는가.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을 더하면 그 지혜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서 우리 학문이 출발해야 한다. 남이 만들어 놓은 답을 얼마나 잘 따라가느냐가 아니라 우리 자연에서 우리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학문적 독립이다.

ADB 물 전문가들과 이어진 질의와 토론 2026년 8월 12일 필리핀 마닐라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열린 ‘An Asia-Pacific Approach to Water Security’ 세미나에서 발표 후 참석자들과 토론하고 있다. 몬순지역의 빗물관리와 분산형 식수공급에 대해 질문이 이어지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맞는 물관리 해법의 가능성을 논의했다.
▲ADB 물 전문가들과 이어진 질의와 토론 2026년 8월 12일 필리핀 마닐라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열린 ‘An Asia-Pacific Approach to Water Security’ 세미나에서 발표 후 참석자들과 토론하고 있다. 몬순지역의 빗물관리와 분산형 식수공급에 대해 질문이 이어지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맞는 물관리 해법의 가능성을 논의했다. 한무영

아시아·태평양은 기후위기의 피해자만이 아니다


ADB에서 나는 세 가지 메시지를 강조했다. 첫째, 아시아·태평양의 몬순지역은 기후위기의 피해자로만 머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물관리 방법을 세계에 보여주는 지역이 될 수 있다. 비가 많이 온다는 것은 홍수 위험이 크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하늘에서 엄청난 양의 수자원이 공급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홍수가 나면 "비가 너무 많이 왔다"고 말하고, 가뭄이 오면 "물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중요한 질문 하나가 빠져 있다. 비가 많이 왔을 때 그 물을 얼마나 모아두었는가? 문제는 비 자체만이 아니다. 그 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도 중요하다. 비가 많은 몬순지역은 기후위기의 약점을 가진 지역인 동시에, 그 비를 잘 관리한다면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두 번째 메시지는 분산형 물관리였다. 현대의 상수도는 주로 좋은 수원을 찾아 댐이나 취수장에서 물을 확보하고, 대규모 정수장에서 처리한 뒤 관로를 통해 공급한다. 도시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섬이나 산간지역, 농촌의 작은 마을과 학교처럼 중앙집중식 상수도가 도달하기 어렵거나 공급이 불안정한 곳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 곳에서도 비는 내린다. 학교에는 지붕이 있고 마을에도 지붕이 있다. 그곳에 떨어지는 빗물을 모아 저장하고 적절하게 처리하면 바로 그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수원이 된다. 중앙집중형 시스템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앙집중형과 분산형을 지역 조건에 맞게 함께 사용하자는 것이다. 한쪽에 문제가 생겨도 다른 쪽이 버틸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효율성만큼이나 이런 물 시스템의 맷집, 즉 회복탄력성이 중요하다.

ADB에서 강조한 세 번째 메시지는 아주 간단했다. 빗물은 돈이다. 하늘에서 공짜로 내려오는 물을 우리는 너무 쉽게 버린다. 도시에서는 비가 내리면 가능한 한 빨리 배수구와 하수도, 하천을 통해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댐을 만들고, 멀리 있는 물을 끌어오고, 펌프로 올리고, 정수하고, 긴 관로를 통해 다시 공급하는 데 많은 돈과 에너지를 사용한다.

빗물은 단순히 마실 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장한 물은 가뭄 때 사용할 수 있고, 비가 한꺼번에 하류로 흘러가는 것을 줄이면 홍수 부담도 낮출 수 있다. 땅으로 스며들게 하면 지하수를 채울 수 있으며, 식물과 토양에 머문 물이 증발할 때는 주변의 열을 빼앗아 도시를 식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 빗물 한 방울에 여러 기능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 물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먼저 관리하고 이용하는 것이 과연 낡은 기술일까. 오히려 기후위기 시대에는 다시 평가해야 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ADB에서 제안한 ‘몬순지역에 맞는 물관리’ 2026년 8월 12일 필리핀 마닐라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물 관련 전문가들에게 아시아·태평양의 자연조건에 맞는 물관리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비가 많은 몬순지역에서는 외국의 해법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빗물을 활용한 분산형 물관리 등 지역 특성에 맞는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ADB에서 제안한 ‘몬순지역에 맞는 물관리’ 2026년 8월 12일 필리핀 마닐라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물 관련 전문가들에게 아시아·태평양의 자연조건에 맞는 물관리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비가 많은 몬순지역에서는 외국의 해법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빗물을 활용한 분산형 물관리 등 지역 특성에 맞는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무영

발표가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다

발표가 끝난 뒤 예상보다 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약 15개의 질문이 나왔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새로운 종류의 물을 발견한 것도 아니고, 전혀 새로운 자연현상을 설명한 것도 아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그 자리에서 받아 이용하고, 많이 올 때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자는 이야기였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여서 오히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첨단 기술과 거대한 시설을 찾기 위해 멀리 바라보는 동안 우리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날 ADB에서 나온 많은 질문은 빗물이라는 너무나 익숙한 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생각은 마닐라에서의 발표로 끝나지 않는다. 오는 9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는 빗물의 이용과 관리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 RWHM2026이 열린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전문가들이 모이지만, 나는 이 학술대회에서 특히 몬순지역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도 오랜 물관리 경험이 있고, 캄보디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우기에 물을 모아 건기에 사용하는 생활의 지혜와 문화가 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통 속에 담긴 원리를 찾아 현대 과학으로 검증하고 새로운 기술과 결합해 오늘의 홍수·가뭄·폭염·식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용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개발도상국에서 열리는 많은 국제회의에서는 선진국의 경험과 기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세계와 나눌 지식과 경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프놈펜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가 그런 작은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광복 81년, 이제 우리 머리로 생각해 보자

광복은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사건이었다. 81년이 지난 지금, 나는 광복절을 맞아 또 하나의 독립을 생각한다. 학문적 독립이다. 그것은 세계와 담을 쌓는 것이 아니며 외국의 학문을 배척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의 좋은 지식과 기술은 적극적으로 배우되, 우리 땅에 비가 어떻게 내리는지 우리 눈으로 관찰하고, 우리 역사와 경험을 돌아보고, 우리 머리로 질문하고, 우리 자연조건에 맞는 답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이 좋다면 세계와 나누자는 것이다.

비가 적게 오는 나라에서 만들어진 해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가 많이 오는 나라에는 비가 많이 오는 나라의 질문이 있어야 한다. 그 질문에서 새로운 학문과 기술이 나올 수 있다. 아시아의 비는 아시아가 가장 잘 알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세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 우리가 가진 경험과 지혜를 현대 과학과 결합해 세계에 돌려줄 차례다. 광복 81년을 맞아, 나는 그것을 또 하나의 독립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개발은행 #몬순형물관리 #아시아식물관리 #빗물관리 #분산형물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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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빗물박사.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 빗물의 중요성을 알리고, 다목적 분산형 빗물관리를 통하여 기후위기를 극복할수 있다는 것을 학문적, 실증적으로 국내외에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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