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점퍼는 그대로인데, 재난대책은 계절마다 바뀐다 가뭄이 오면 물을 확보하기 위한 회의를 하고, 집중호우가 오면 물을 빨리 빼기 위한 회의를 한다. 폭염과 산불이 닥치면 또 다른 대책과 예산이 마련된다. 위기의 이름과 예산은 계속 바뀌지만 회의하는 사람과 방식은 비슷하다. 가뭄과 홍수, 폭염이 반복되는 우리나라에서는 재난이 닥칠 때마다 단일목적 예산을 투입하기보다, 하나의 투자로 여러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항구적·복합적 대책이 필요하다.
한무영
가뭄대책회의와 홍수대책회의에는 공통점이 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노란색 재난안전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가뭄 때도 노란 점퍼이고 홍수 때도 노란 점퍼다. 참석하는 기관과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 회의에서는 물이 없어서 걱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회의에서는 물이 너무 많아서 걱정한다. 이런 모습이 한두 해의 일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가뭄과 홍수가 반복될 때마다 비슷한 회의와 대책이 되풀이된다.
나는 이것을 담당 공무원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주어진 재난에 최선을 다해 대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가뭄, 홍수, 폭염을 각각 별개의 문제로 나누어 대응하도록 만들어진 행정과 예산의 구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예산을 쓸 때쯤이면 원인이 사라질 수도 있다
여기서 예산의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재난이 발생했다고 바로 돈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파악하고 대책을 만들고 예산을 확보하고 사업계획을 세우고 행정절차를 밟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자연은 그 행정절차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가뭄 때문에 시작한 사업의 예산을 실제 집행할 때쯤에는 충분한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어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 비 때문에 이번에는 홍수를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미 확보한 가뭄대책 예산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상황이 달라졌다면 사업의 필요성을 다시 검토하고 더 필요한 곳으로 돌리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한번 확보한 예산을 불용시키거나 당초 정해진 사업의 목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어렵게 확보한 예산인 만큼 계획대로 집행하려는 압력도 생길 수 있다.
결국 자연의 시간표와 행정·예산의 시간표가 서로 맞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폭염대책을 준비하다 보면 가을이 온다
폭염도 마찬가지다. 기온이 치솟으면 폭염대책회의가 열린다. 그늘막을 설치하고 도로에 물을 뿌리고 무더위쉼터를 확대하고 새로운 사업을 찾는다. 물론 모두 필요한 대책이다. 그러나 폭염이 닥친 뒤 정책을 결정하고 예산을 확보해 사업을 집행하려 한다면 시간이 걸린다. 본격적으로 돈을 쓸 때쯤에는 여름이 지나갈 수도 있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추위가 온다. 이번에는 한파대책을 준비해야 한다.
가뭄대책, 홍수대책, 폭염대책, 한파대책. 각각의 대책만 보면 틀린 것이 없다. 문제는 하나의 자연현상을 하나의 예산과 하나의 사업으로 해결하려는 단타식 대응이다.
우리나라의 자연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비가 적은 나라가 아니라 변동성이 큰 나라다
우리나라는 가뭄의 나라도 아니고 홍수의 나라도 아니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오는 나라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을 걱정하다가도 짧은 기간에 많은 비가 집중되면 바로 홍수를 걱정한다. 비가 적어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공간적으로 크게 변하는 것이 문제다.
기온도 마찬가지다. 여름에는 폭염을 걱정하지만 겨울에는 한파를 걱정한다. 한쪽 극단만을 기준으로 대책을 세워서는 다른 극단이 찾아왔을 때 다시 새로운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물에서는 모순이 더욱 선명하다. 가뭄만 생각하면 물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홍수만 생각하면 물을 최대한 빨리 버려야 한다. 결국 같은 나라, 같은 지역에서 한쪽 예산으로 물을 구하고 다른 쪽 예산으로 물을 버리는 일이 생긴다.
홍수 때 버리는 물과 가뭄 때 필요한 물은 같은 물이다
여기서 생각을 한번 바꿔보자. 홍수 때 버리려고 하는 물과 가뭄 때 그렇게 애타게 찾는 물은 사실 같은 물이다. 단지 내리는 시기가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비가 많이 올 때 무조건 빨리 버리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곳곳에 나누어 받아두면 어떨까. 건물 지붕, 학교, 공장, 공원, 주차장 등 비가 내리는 곳 가까이에 저장하고 침투시킬 수 있는 공간을 평상시에 만들어 놓는 것이다.
폭우가 내리면 빗물을 잠시 받아 하류로 한꺼번에 몰리는 것을 줄인다. 홍수대책이 된다. 저장한 물은 비가 오지 않을 때 조경·청소·농업용수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 가뭄대책이 된다. 여름에는 그 물을 나무와 녹지에 공급하고 증발시키면서 주변의 열을 낮추는 데 활용할 수 있다. 폭염대책도 된다. 일부를 땅속으로 침투시키면 지하수를 보충하고 도시의 물순환을 회복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하나의 물을 여러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날씨가 바뀌어도 쓸모가 바뀌지 않는 예산
이렇게 생각하면 예산을 쓰는 방법도 달라질 수 있다. 가뭄예산 따로, 홍수예산 따로, 폭염예산 따로 만드는 것보다 하나의 투자가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빗물을 저장하고 침투시키고 활용할 수 있는 시설에 투자한다면 올해 가뭄이 해소되었다고 그 시설이 쓸모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가 많이 오면 홍수 저감에 사용하고, 비가 오지 않으면 저장한 물을 사용하고, 폭염 때는 도시를 식히는 데 활용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물순환을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이것을 '날씨가 바뀌어도 쓸모가 바뀌지 않는 예산'이라고 부르고 싶다. 기후변동성이 커질수록 이런 예산이 많아져야 한다. 특정 재난이 발생한 뒤 급하게 만드는 단기예산보다 평상시에 준비해 놓고 여러 재난에 사용할 수 있는 상시적이고 다목적인 투자가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노란 점퍼를 입기 전에 준비하자
재난이 발생하면 노란 점퍼를 입고 회의를 해야 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좋은 재난정책의 목표는 회의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란 점퍼를 입고 긴급회의를 해야 할 상황 자체를 줄이는 것이어야 한다. 기후는 정부 조직의 업무분장에 맞추어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은 가뭄, 홍수, 폭염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하나씩 차례대로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러니 우리의 대책과 예산도 각각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가뭄이 오면 물을 구하고, 비가 오면 그 물을 버리고, 더우면 다시 물을 뿌리는 일을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내년에도 노란 점퍼를 입고 같은 회의를 반복하기 전에 질문을 바꿔보자. 비가 올 때 그 물을 잘 받아두어 홍수를 줄이고, 가뭄 때 사용하고, 폭염 때 도시를 식힐 수는 없을까. 가뭄과 홍수, 폭염이 반복되는 우리나라에서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하나의 문제만 해결하는 단타식 대책이 아니다. 자연의 변동성을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투자로 여러 문제에 대비하는 항구적이고 복합적인 대책이다. 그것이 국민의 세금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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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빗물박사.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 빗물의 중요성을 알리고, 다목적 분산형 빗물관리를 통하여 기후위기를 극복할수 있다는 것을 학문적, 실증적으로 국내외에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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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예산 집행할 때 비가 온다면... 재난대책, 이대로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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