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 안 넣어도 달콤, 단호박 두 개로 만든 한 냄비

입맛 잃은 남편을 위해 만든 호박죽

등록 2026.08.18 17:36수정 2026.08.1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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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가을이 오려나.'


하긴 입추도 지났으니 이제 여름도 조금씩 힘을 잃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 나는 그 바람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그런데 웬걸, 시원한 바람은 어느새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연일 들려오지만 내가 사는 곳에는 비는커녕 하늘만 말짱하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우렁차고 씩씩한 매미 소리만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그래, 여름이 그렇게 쉽게 물러갈 리 없지. 아직 물러가지 않은 더위 탓인지 남편은 요즘 좀처럼 밥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

"난 이제 밥 먹기 싫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난감해진다. 여름이면 입맛을 돋우는 갖가지 음식이 많건만, 남편이 밥을 먹지 않으니 나 역시 제대로 된 밥상을 차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빵과 과일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혹시 영양이 부족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 살아가는 재미 가운데 먹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는데, 밥맛을 잃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요즘은 가끔 유튜브를 보며 제철 채소와 여러 식재료를 골고루 넣은 균형 잡힌 식단을 눈여겨본다. 잘 먹지 못하고 편식하다가 건강을 잃으면, 그때는 삶의 소소한 즐거움 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 계절 과일도 챙기고, 고구마 감자, 단호박도 사다 놓고 조금씩 골고루 먹고 있다.

그러다 문득 생각 하나가 떠 올랐다. 지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여러 취미 생활도 좋지만, 건강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긴 뒤에 '그때 조금 더 잘 챙길걸' 하고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내가 어디에 시간을 쓰고 있는지, 무엇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지 가끔 돌아본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너무 자주 먹으면 물리는 법이다. 음식도 마음도 조금씩 바꾸어 가며 살아야 한다.


 입맛 없는 남편을 위해 호박죽을 끓였다.
입맛 없는 남편을 위해 호박죽을 끓였다. 이숙자

오늘 아침에는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단호박 두 개를 꺼냈다. 껍질을 벗기고 잘라 씨를 긁어낸 뒤 썰어서 큰 냄비에 넣어 삶았다. 팥도 깨끗이 씻어 따로 삶았다. 쌀가루가 조금 부족한 듯해 멥쌀도 물에 담가 두었다. 호박이 익자마자 믹서기에 곱게 갈고 불려 둔 쌀도 갈아 체에 밭쳤다. 삶은 팥까지 준비하고 나니 호박죽을 끓일 준비가 끝났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과정이 참 번거롭다. 손에 익지 않으면 쉽게 도전하는 게 어렵다. 삶은 살아온 내공만큼 일의 속도와 두려움을 걷어내는 효능이 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하나가 식탁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필요한가. 내가 장을 보고 가져온 호박 한 덩이에도 그것을 심고 가꾸고 수확한 농부의 수고가 있었을 것이다. 팥과 쌀도 마찬가지다. 음식 하나를 만들며 나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의 수고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음식 앞에서는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한다.


설탕은 전혀 넣지 않았지만 팥을 넣어 달콤하고 맛있다. 한참을 끓인 끝에 따뜻한 호박죽이 한 냄비가 완성되었다. 거의 아침나절을 다 보내고 서야 죽은 완성되었다. 일련의 과정들이 복잡해 쉽게 호박죽 끓인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남편이 한 그릇 맛있게 먹어주면 좋겠다.

수저로 떠서 접시에 담아 간을 보니 와, 이건 별천지 맛이다. 맛있다. 나는 오늘도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살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평범한 하루가 가장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밥 한 끼를 걱정하고, 건강을 살피고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누는 일. 거창한 일을 해야만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살피고 지금 내가 해야 할 수 있는 일을 정성껏 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삶의 중요한 것들을 마음에 새기며, 작은 지혜 하나를 더 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60대 이상 시민기자들의 사는이야기
#여름 #더위 #입맛 #호박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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