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하동에서 만난 진짜 '헤리티지'

쌍산재에서 하룻밤, 화엄사의 공양과 구층암의 차 한 잔… 사람과 삶을 만난 1박 2일

등록 2026.08.19 16:01수정 2026.08.1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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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과 17일, 비가 내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했습니다. 여행하기에는 다소 불편한 날씨였지만, 비에 젖은 지리산과 섬진강은 오히려 평소보다 짙었습니다.

금호고속과 현대홈쇼핑이 준비한 '구례 쌍산재 헤리티지 투어'​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유명 관광지를 얼마나 많이 둘러보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오래된 공간에는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는지, 그 공간을 지켜온 사람들은 누구인지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유산을 '보는 여행'에서 지역의 삶을 '경험하는 여행'으로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비 내리는 화엄사, 공양 한 끼도 여행이 되었습니다

첫 목적지는 지리산 자락의 천년고찰 화엄사였습니다. 비에 젖은 산사는 고요했습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경내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무심코 지나칠 풍경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여행은 날씨가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맑은 날에는 먼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면 비 오는 날에는 가까운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임세웅

점심은 화엄사에서 공양으로 해결했습니다. 관광지 주변의 유명 식당을 찾아가는 대신 절에서 정갈한 밥 한 끼를 먹었습니다. 화려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이번 여행의 성격과 잘 어울렸습니다.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그곳의 풍경만 보는 일이 아닙니다. 그곳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생활 방식, 오랫동안 이어져 온 문화를 함께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구층암에서 차를 마시다

점심을 마친 뒤 숲길을 따라 구층암으로 향했습니다. 구층암에서는 차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산사에서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 차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조금씩 말수가 줄었습니다.


 구례 화엄사 구층암 차담
구례 화엄사 구층암 차담 임세웅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무언가를 계속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장소에서는 설명보다 침묵이 더 좋은 해설이 되기도 합니다. 차를 마시고, 바람 소리를 듣고, 오래된 나무와 암자를 바라보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헤리티지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이런 시간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지역의 풍경이 되다

구례에서 섬진강을 따라 광양 청매실농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에서는 홍쌍리 명인을 만났습니다. 봄이면 매화가 산을 뒤덮는 청매실농원의 풍경은 많은 사람에게 익숙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만 보고 돌아가면 그 풍경을 만든 사람의 시간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고 가꾸는 일이 수십 년 이어지고, 그것이 어느 순간 한 지역을 대표하는 풍경이 됩니다.

 청매실농원
청매실농원 임세웅

홍쌍리 명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헤리티지'라는 말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문화유산은 오래된 건물과 유물만을 의미할까. 평생 한 가지 일을 이어온 사람의 삶과 기술, 경험 역시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유산이 아닐까. 이번 여행에서 참가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이유

다시 구례로 돌아와 쌍산재에 짐을 풀었습니다. 쌍산재는 관광객이 잠시 들렀다 가는 고택으로도 아름답지만, 이곳의 매력은 하룻밤을 머물렀을 때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구례 쌍산재
구례 쌍산재 임세웅

저녁은 강남가든에서 버섯전골과 돌솥밥을 먹었습니다. 하루 종일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 따뜻한 전골을 가운데 두고 앉으니 자연스럽게 오늘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식사 후에는 반야원 플라타너스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여행 일정을 빽빽하게 채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움직이기보다는 잠시 멈춰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는 것도 여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쌍산재에서 맞은 아침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기 전 쌍산재를 산책했습니다. 밤새 비에 씻긴 돌담과 대숲, 오래된 한옥이 아침빛을 받고 있었습니다. 대숲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새소리가 들렸습니다. 평소 같으면 관광객들로 북적일 공간을 조용히 걸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람에게 주어진 작은 선물 같았습니다. 산책을 마치자 종부님이 차려준 아침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밥과 반찬이 놓인 정갈한 밥상이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쌍산재 종부님의 아침 밥상
쌍산재 종부님의 아침 밥상 임세웅

우리가 지켜야 할 문화유산은 고택의 기둥과 기와만일까. 그 집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음식과 손님을 맞는 방식, 밥상을 차리는 마음 역시 그 공간의 역사입니다. 건축물만 남고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가 사라진다면 과연 온전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커피 한 잔으로 대한제국을 만나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양탕국커피문화원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역사를 커피라는 소재를 통해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커피는 너무나 일상적인 음료입니다. 그러나 한 잔의 커피를 역사 속에 놓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커피를 접하기 시작했는지, 당시 사람들에게 커피는 어떤 음료였는지를 들으며 마시는 커피는 평소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와 달랐습니다.

 하동 양탕국커피문화원
하동 양탕국커피문화원 임세웅

'커피를 마신다'에서 '커피를 통해 시대를 읽는다'로 경험이 확장됐습니다. 지역 관광이 재미있어지려면 이런 방식의 접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례와 하동을 연결한 것은 '차'였습니다

이어 섬진강을 따라 하동 쌍계사를 찾았습니다. 구례와 하동은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지만 지리산과 섬진강을 공유합니다. 사람과 물자가 오랫동안 오갔고 문화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두 지역을 연결해준 것은 '차(茶)'였습니다. 쌍계사를 둘러본 뒤 좋은세상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티카페하동으로 이동해 티소믈리에 체험을 했습니다. 차의 빛깔을 보고 향을 맡고 천천히 맛을 음미했습니다.

 하동 티카페하동 티 소믈리에
하동 티카페하동 티 소믈리에 임세웅

전날 구층암에서 마신 차와는 또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구층암에서의 차가 산사의 공간과 사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면, 하동에서는 차 자체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같은 차 한 잔이 장소와 이야기에 따라 서로 다른 여행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을 책방에서 보낸 까닭

1박 2일 여행의 마지막 장소는 섬진강책사랑방이었습니다.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작은 책방에서 여행을 끝냈습니다. 책을 둘러보고 잠시 앉아 지난 이틀을 돌아봤습니다.

 구례 섬진강책사랑방
구례 섬진강책사랑방 임세웅

화엄사의 공양, 구층암의 차담, 홍쌍리 명인과의 만남, 쌍산재에서 보낸 하룻밤과 종부님의 아침 밥상, 대한제국의 커피 문화, 쌍계사와 하동의 차.

각각 다른 장소와 경험이었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 하나의 공통점이 보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습니다.

문화유산을 보는 여행에서 사람을 만나는 여행으로

지역 관광을 이야기할 때 새로운 관광 시설을 만들고 새로운 볼거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하지만 이미 지역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오래된 절이 있고 고택이 있습니다. 차를 만드는 사람이 있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나무를 가꾼 사람이 있고 작은 공간에서 책을 건네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각각의 '관광지'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쌍산재 헤리티지 투어를 진행하면서 오히려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사람과 공간을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화엄사에서 쌍산재로, 구례에서 광양과 하동으로 이동했지만 우리가 따라간 것은 행정구역이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음식과 차, 역사와 생활 문화가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여행이 끝나면 관광지의 이름은 잊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내어준 따뜻한 차 한 잔, 정성스럽게 차려준 아침 밥상, 평생 한 가지 일을 지켜온 사람의 이야기는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다음 여행도 조금 천천히 가려고 합니다.

많이 보기보다 깊이 보고, 빨리 지나가기보다 머물고, 관광지를 소비하기보다 그곳의 사람을 만나는 여행. 지역의 진짜 헤리티지는 결국 그곳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지난 8월 16일과 17일에 진행된 여행의 후기입니다.
#구례 #쌍산재 #헤리티지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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