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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콤한 자두와 리코타치즈에 곁들이는 음료

    영국 여왕을 홀렸다는 대만 명차 '동방미인'

    등록 2026.08.23 10:57수정 2026.08.2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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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기자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는 건 이제 팽창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이기도 하다. 매운 맛보다는 신맛을 더해주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해서 자두를 곁들여봤다.
    ▲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는 건 이제 팽창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이기도 하다. 매운 맛보다는 신맛을 더해주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해서 자두를 곁들여봤다. 노시은

    "處暑無三日,新涼直萬金."
    (처서가 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새로 찾아온 서늘함은 만금보다 귀하다.)

    송나라 시인 소경(蘇泂)은 '장강이수'(長江二首)에서 처서(8월 23일) 무렵 찾아온 서늘함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이 얼마나 우아하고도 탐나는 처서인가요. 아침에 문을 열었더니 바람의 결이 어느새 달라져 있고, 한여름 내내 사람을 들들 볶던 열기는 거짓말처럼 한발 물러나 있다니요. 게다가 그 서늘함이 '만금'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하다니, 여름을 보내느라 진이 빠진 사람의 마음을 천 년 전 시인이 어쩌면 이렇게 잘 알았을까요.

    그런데 요즘 우리가 맞이하는 처서의 현실은 아무래도 다른 송나라 시인 여본중(呂本中)의 푸념에 조금 더 가까운 듯합니다. 그는 '처서'(處暑)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平時遇處暑,庭戶有餘涼."
    (평소 처서를 맞을 때면 집 안과 뜰에 서늘한 기운이 넉넉했건만)

    문제는 그가 머물던 남쪽 지방이었습니다. 처서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더웠던 모양입니다. '처서면 원래 좀 서늘해야 하는데 여긴 왜 이러지?' 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이 푸념만큼은 어쩐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처서라기에 기대를 품고 문을 열었다가 후끈한 공기에 다시 문을 닫아버리는 요즘의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한여름의 속도를 내려놓을 때

    24절기 가운데 열네 번째 절기인 처서(處暑). '처(處)'라는 글자에는 '숨다, 그치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여름을 지배했던 끈적한 열기가 마침내 걸음을 멈추는 때라는 뜻이지요. 물론 계절은 달력 한 장 넘기듯 순순히 자리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이 무렵 마지막으로 기승을 부리는 늦더위를 '가을의 늙은 호랑이'라는 뜻의 '추로호'(秋老虎)라고 부릅니다. 한여름 피 끓듯 맹렬했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남은 기운을 쥐어짜며 한 번씩 으르렁거리는 늙은 호랑이 같은 더위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절묘한 표현입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이제 정말 가을인가 싶게 서늘하다가도 한낮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훅 더워지니까요. 그래도 호랑이는 늙었습니다. 기세가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그 사이 자연은 분명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곡식은 여물고 풀과 나무의 성장은 느려집니다. 계절의 방향이 발산에서 수렴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자연의 흐름이 달라지면 몸을 돌보는 방법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중국의 오래된 의학서 <황제내경>에서는 가을 석 달을 두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정신과 기운을 거두어들인다(收斂神氣)'고 했습니다. 여름 내내 바깥으로 뻗혔던 기운을 가을에는 서서히 안으로 모으라는 것.

    우리나라의 <동의보감>에서도 이러한 계절의 지혜를 이어받았습니다. 가을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정신과 기운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거두어들이라고요. 자연이 발산에서 수렴으로 방향을 바꾸듯 사람도 이제 한여름의 속도를 조금씩 내려놓을 때가 된 것입니다.


    먹는 것도 달라집니다. 여름 동안 땀을 많이 흘린 몸에는 수분을 충분히 보충하고, 밖으로 흩어지고 발산하는 매운맛은 줄이고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신맛은 늘리라고 권합니다.

    대만의 명차 '동방미인'

     자두에 리코타치즈를 얹고 꿀을 살짝 뿌린다? 극락 근처까지 갈 수 있다.
    ▲ 자두에 리코타치즈를 얹고 꿀을 살짝 뿌린다? 극락 근처까지 갈 수 있다. 노시은

    신맛이라면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 한 입 깨물면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이는 선명한 산미가 있는 자두를 떠올렸습니다. 붉게 익은 자두만 먹자니 허전해서 순백의 리코타 치즈를 숟가락으로 툭, 무심하게 한 덩이 얹습니다. 그 위로 황금빛 꿀을 대충 한 바퀴. 제법 그럴듯한 늦여름의 한 접시가 완성됩니다. 이런 음식이 저는 좋습니다. 힘 하나 안 들였는데 예쁘고, 맛있는 것.

    무슨 차를 곁들이면 좋을까 생각하다 대만의 명차 '동방미인(東方美人)'을 꺼냅니다. 이 차에는 유명한 전설이 전해지죠.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맑은 호박빛 찻물과 우아한 향에 반해 '동방의 미인'이라 불렀다고요. 다만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기록은 없어 어디까지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보는 편이 맞습니다. 그래도 호박빛 찻물이 잔 안에서 천천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 이 차에 '미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던 마음만큼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대만 명차 동방미인 마른 찻잎의 특색은 다양한 색깔이 어우러져 있는 것. 그 가운데 흰 털이 보송한 잎도 섞여 백호오룡이라 불린다.
    ▲ 대만 명차 동방미인 마른 찻잎의 특색은 다양한 색깔이 어우러져 있는 것. 그 가운데 흰 털이 보송한 잎도 섞여 백호오룡이라 불린다. 노시은

    동방미인은 또 '백호오룡(白毫烏龍)'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어린 싹과 잎에 은백색의 가느다란 솜털인 백호(白毫)가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녹색과 붉은빛, 갈색 사이사이로 흰 솜털을 두른 어린 싹이 섞여 있어 찻잎 자체도 제법 화려합니다. 뿐만 아니라 '팽풍차(膨風茶)'라는 재미있는 이름도 있어요. '팽풍'은 대만어로 '허풍을 떨다'라는 뜻입니다.

    소록엽선(小綠葉蟬)이라는 아주 작은 초록 벌레가 어린 찻잎에 달라붙어 진액을 빨아먹으면 잎에는 상처가 남습니다. 차농 입장에서는 멀쩡한 찻잎을 망쳐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변한 찻잎으로 차를 만들었더니 뜻밖에도 꿀과 잘 익은 과일을 닮은 특별한 향기가 났습니다.

    이 차가 높은 값에 팔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웃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며 허풍 떤다고 여긴 데서 '팽풍차'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벌레 먹은 차를 비싸게 팔았다고 자랑했으니,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에이, 뻥치지 마" 싶었을 법도 하네요.

    가을을 맞이할 채비

     동방미인 차와 자두만 먹었으면 조금 어색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리코타치즈가 아주 적절하게 둘을 부드럽고 맛있게 이어주었다.
    ▲ 동방미인 차와 자두만 먹었으면 조금 어색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리코타치즈가 아주 적절하게 둘을 부드럽고 맛있게 이어주었다. 노시은
    동방미인은 청차 가운데서도 발효도가 높은 편입니다. 풋내와 거친 떫은맛은 적고, 맑은 호박빛 찻물에서는 잘 익은 과일과 꿀을 연상시키는 풍성한 향이 피어납니다. 특히 동방미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꿀처럼 달콤한 향, 밀향(蜜香)입니다.

    자두에 리코타 치즈를 얹어 한 입 베어 뭅니다. 날카롭게 올라오던 산미가 담백하고 크리미한 치즈 속에서 금세 둥글어집니다. 뒤이어 꿀의 단맛이 살짝 묻어날 때 따뜻한 동방미인을 한 모금 마십니다.

    그 순간 접시 위의 꿀과 찻잔 속의 밀향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입안에는 시고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차례로 지나가고, 코끝에는 잘 익은 과일의 향기가 머뭅니다. 큰 노력 없이도 향긋하고 제철음식 챙겨 먹는 기분이 나서 괜히 스스로 대견하네요.

    어쩌면 처서의 찻자리에는 이 정도가 알맞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언가를 더하고 더해서 여름의 풍성함을 붙잡기보다, 조금 덜어내고 천천히 거두어들이는 것. 계절이 물러나는 뒷모습은 언제나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늙은 호랑이의 하품처럼 무뎌진 늦더위가 지나가는 오후, 무심하게 썰어낸 자두 한 접시와 호박빛 차 한 잔. 바쁘게 밖으로만 치닫던 마음을 조용히 내 안으로 거두어들이며, 나만의 온전한 가을을 맞이할 채비를 해봅니다.
    #처서 #노시은작가 #스누피홀릭 #동방미인 #티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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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배낭 속의 영국 남자』, 『언제라도 티타임』, 『화요일의 티타임』의 저자. 세상 구경하고 차 마시며 글, 사진, 영상, 그림으로 삶을 기록합니다. 아직은 벌이가 시원찮은 유튜버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는 진심입니다. 좋은 기획과 재미있는 작업 제안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 비즈니스(출간·강의·글작업) 문의: peanutshol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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