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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 대신 행동으로 속죄한 명진 스님, 잊지 않겠습니다

    제주 해상 사고로 법랍 52년 만에 입적한 명진 스님을 추모하며

    등록 2026.08.23 11:57수정 2026.08.2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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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 스님. 명진 스님.

    너무나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더니, 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에 저는 느닷없이 쏟아지는 빗속에 몸을 맡기고 한참을 우두커니 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과 인연 맺으며 지내온 시간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스치며 벌써부터 그리움이 참을 수 없이 솟구쳐 오릅니다. 스님. 정녕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 사실입니까?


    195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속세 나이로 76세. 1969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1974년 탄성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아 법랍 52년이 되는 2026년 8월 22일, 제주 서귀포시 하예포구 인근 해상에서 오전 9시 38분경 해상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니 저는 여전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 날, 스님과 안부 전화를 나누던 목소리가 여전히 또렷한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

    그날 오래 전부터 저희 집에 한번 오시겠다고 하셨으나 스님의 여러 사정으로 이뤄지지 못한 것을 장난스레 원망하니 껄껄 웃으시며 "내가 지금은 제주도에 있으니 그렇고, 이번 10월에는 꼭 갈테니 기다리고 계시오. 내 이번엔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소"라고 하시던 말씀이 이 세상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너무나 비통하고 서러운 마음입니다. 스님.

     봉은사 주지를 지낸 명진스님이 22일 입적했다. 명진스님 지인 등에 따르면 스님은 이날 오전 제주도 바다에서 프리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사진은 2020년 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명진스님.
    ▲ 봉은사 주지를 지낸 명진스님이 22일 입적했다. 명진스님 지인 등에 따르면 스님은 이날 오전 제주도 바다에서 프리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사진은 2020년 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명진스님. 연합뉴스

    돌아보니 스님과의 인연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이 맺어준 '또 하나의 인연'이었네요.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장준하 선생님을 2012년 8월 파주로 이장하던중 두개골에서 외부 가격흔이 발견되어 타살 의혹이 본격화된 적이 있었지요. 그래서 같은 해 10월 6일, 포천 흑룡사에서는 장준하 선생 천도재가 개최되었는데 그때 강연자로 스님과 제가 초청 받아 그 자리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한편 그날 명진 스님의 강연은 세상의 큰 화제가 되었지요. 2012년 대선에 출마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자기 아버지 박정희의 독재 전력을 비판하는 세간의 목소리를 두고 "역사에 맡기자"며 회피했습니다. 이에 스님은 그날 강연에서 "역사가 무슨 전당포냐?"며 일갈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무겁던 자리에서는 한바탕 웃음이 터졌지요. 이어 스님은 "박근혜가 차라리 아버지 무덤에 침을 뱉으면서까지 사과는 못하겠다고 말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며 철촌살인과도 같은 말씀으로 많은 이들에게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실천하는 행동, '큰 절 사건'


    스님은 생전 말씀만 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실천하는 행동'으로도 깨우침을 주신 분입니다. 대표적인 일화가 지난 2015년 4월 9일 경북대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이른바 스님의 '큰 절 사건'입니다.

    그날 경북대 강당에서는 베트남 전쟁 종전 40년(종전일 1975년 4월 30일)을 맞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강원도 오대산 모처에서 동안거 중이던 스님도 행사 소식을 듣고 참석을 하셨지요.

    응우옌 떤 런(2015년 당시 64세) 아저씨는 학살 비극이 있던 그날, 열 다섯 살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한국군이 마을 주민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후 수류탄 투척과 총기를 난사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노인과 갓난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청소년이었고 베트콩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주민 누구도 무기를 든 사람이 없었는데 한국군은 마구잡이 학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고통은 따로 있었습니다. 학살이 있던 그날 밤, 바로 옆에서 엄마와 누이동생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상을 입고 고통 속에 누워있을 때 엄마와 여동생의 시신이 거적에 싸여 실려 나가는 순간을 증언하던 런 아저씨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눈물은 행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전파되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들이 전쟁의 고통 속에 죽어갔으니 오죽할까요. 그러자 주최 측에서 스님을 찾았다고 합니다. 오열과 슬픔에 빠진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스님에게 위로의 말씀을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강당 맨 뒷자리에 앉아 계시던 명진 스님은 몇 번의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주최 측이 거듭 요청하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오시더니 갑자기 누구도 생각지 못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흰 승복을 입은 스님께서 갑자기 베트남 학살 생존자 분들 앞에서 납작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며 큰 절을 한 것입니다.

    일순간, 모든 이들이 당황했습니다. 오열하던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 분들이 깜짝 놀라 앞으로 달려 나와 황급히 노 스님을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일으켜 세운 스님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눈물을 보고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 분들의 서러운 마음도 조금은 녹아들지 않았을까요.

    훗날 명진 스님에게 제가 여쭸습니다. 그날 왜 갑자기 그분들에게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하셨냐고요. 그때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사실은 말을 아주 잘 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도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무릎 꿇고 사과한 겁니다. 그거 외엔 제가 그 분들에게 할 말이 없겠다 싶더라고요."

    명진 스님의 비밀

    명진 스님은 왜 그날 할 말이 없었을까요? 알고 보니 거기에는 그날 이전까지 '누구도 모르던' 스님의 비밀 사연이 있었습니다. 스님이 1974년 사미계를 받아 승려 '명진'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1971년, 스님은 속세에서 '한기중' 이름으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2년 일병 복무중에 평소 후임병을 괴롭히던 병장과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는데 이게 문제가 되어 중대장에게 불려가게 됩니다. 이때 중대장이 한 일병에게 제안한 것이 의외였는데 "너 영창 갈래? 아니면 베트남 갈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 호기심 많았던 한 일병은 '영창' 대신 '베트남'행을 선택, 그 해 3월 부산항을 출발하여 6박 7일 항해 끝에 베트남 퀴논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베트남에서 정확히 1년간 파병 참전한 후 전역했다고 합니다. "파병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무엇인지" 여쭤보니 답변이 의외였습니다. 당시 통신병 보직이라서 총 자체를 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파병 기간이었던 1972년부터 1973년 사이 베트남은 지금 우리나라 남북 휴전 상태와 같은 평온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총을 쏘는 것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냥 1년간 시간만 보내다 온 게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경북대 강당에서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 생존 피해자 분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 군에 의한' 만행 사실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명진 스님의 사과는 그날 하루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전쟁 피해자 분들을 찾아가 직접 사죄하고자 그 해 7월 8일, 베트남으로 찾아 가셨습니다. 이른바 '명진 스님과 함께하는 평화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각계 인사 27명을 조직한 것입니다. 저도 그 기행에 취재차 7박 8일 동행을 하였습니다.

    스님의 속죄는 진심이었습니다. 평화 기행 둘째 날, 베트남 전쟁 중 고엽제 피해자들과 만나던 날이었습니다. 베트남의 정글 숲을 제거하기 위해 미군은 전쟁 중 약 7600만 리터의 고엽제를 대량 살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베트남에는 현재 약 400만 명의 피해자가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고엽제로 피폭된 사람과 그 후손들에게 이어지는 피해 앞에서 스님은 또 무릎을 꿇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고엽제 피해 청년들에게 한국인 노 스님이 '속죄의 큰 절'을 하자 이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이후 스님은 한국으로 돌아와 2016년 창립된 한베평화재단의 창립 이사를 맡아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의 진실과 피해자 존엄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스님, 정말 잘 살아 오셨습니다

     2017년 연극 <이등병의 엄마> 공연후 군의문사 피해자 허원근 일병 아버지, 연극 출연진과 함께 한 명진 스님.
    ▲ 2017년 연극 <이등병의 엄마> 공연후 군의문사 피해자 허원근 일병 아버지, 연극 출연진과 함께 한 명진 스님. 고상만

    또한 스님은 우리 사회의 약자를 위해 늘 진심이었습니다. 2006년 서울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후 스님은 그 해 12월 5일부터 2009년 8월 30일까지 천 일 동안, 매일 천 번씩 절을 하는 '천 일 기도'를 선언합니다. 이 기간동안 스님은 절 밖의 출입을 삼가했는데 마침내 천일 기도가 끝난 날이었습니다. 스님이 천일 기도중 꼭 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늘 마음이 걸린 곳이 있었다며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2009년 1월 추운 날, 경찰의 무리한 진압 끝에 숨져간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정현 신부님의 안내를 받아 참사 현장을 둘러 본 후 스님은 "상황을 수습하고 유족을 위로해야 할 (이명박) 정부는 유족 모두가 지쳐 나가떨어지길 기다리는 게 아닌가"라고 말한 후 지난 3년간 개인적으로 모은 1억 원을 유족에게 위로금으로 전달했습니다. 참사 후 처음으로 위로다운 위로를 받은 피해 유족들은 스님에게 매달려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현장에, 군의문사 유족의 눈물 곁에, 그리고 억울하게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서 늘 위로와 힘을 주시던 명진 스님. 그런 스님이 이제는 우리 곁에 없습니다. 호통만 치던 스님이 아니었습니다. 악한 자에게는 누구보다 매섭게 하셨지만, 사회적 약자에게는 늘 따뜻했고 생각지도 못한 농담을 툭툭 던져 '웃음을 짓게 만드는' 장난꾸러기 같은 스님이었습니다.

    인권운동을 하며 파란 많았던 저에게 늘 의지처가 되어 주셨던 스님. 2017년 연극 <이등병의 엄마> 공연 때도 찾아와 응원해 주셨고 2023년 신원식 전 국방부장관의 박격포 오폭 사건을 고발하여 명예훼손에 무고죄로 맞고소 하며 치열하게 다툴 때도 먼저 전화주셔서 늘 응원하며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스님은 말씀하셨지요. 군인권 운동을 하는 저에게 고맙다고. 나에게도 군인 동생이 있었다고. 스님이 스물 다섯 살 되던 1974년 2월, 당시 네 살 아래 남동생이 해군으로 입대해서 훈련받던 중 통영 앞바다 배 침몰 사고로 159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는데 동생도 그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요. "그 원통한 동생의 죽음을 겪어 군사망사고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데 그 한을 우리 고 선생이 풀어주는 일을 하니 늘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스님이 결국 물 사고로 한 서린 남동생의 뒤를 따라가셨다니 이 기막힌 우연이 제 가슴을 칩니다.

    스님. 2017년, 조계사 앞에서 스님이 '조계종 적폐청산을 위해 단식농성'을 하고 있을 때 농성장으로 찾아온 백기완 선생님의 무릎을 베고 아기처럼 누운 사진이 기억납니다. 이제 먼저 가신 백기완 선생님도 다시 만나 그때처럼 다시 누워 쉬소서. 일평생 사회적 약자를 위해,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스님. 정말 잘 사셨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명진 #스님 #추모사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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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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