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8.24 09:46수정 2026.08.2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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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밤으로 걸어 들어가다

▲ 야간 조명을 받아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서산 해미읍성의 남문, 진남문(?南門)
김지영
23일(일요일) 오후 7시 30분. 해가 완전히 저물고 하늘이 짙은 청색으로 물들 무렵, 나는 서산 해미읍성 앞에 섰다. 낮의 열기는 물러가고, 시원한 밤바람이 성벽을 타고 불어오고 있었다.
진남문(鎮南門)의 처마가 야간 조명을 받아 고즈넉하면서도 위엄 있게 빛났다. 바닥에 깔린 투박한 돌판을 밟으며 문루를 향해 걸었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시간을 거슬러 조선 시대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 어둠 속에 우뚝 선 견고한 돌 성벽. 조선 시대의 숨결이 느껴진다
김지영
성벽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낮에 보면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돌들이지만, 어둠 속에 조명을 받으니 마치 거대한 야수의 등껍질처럼 단단해 보였다. 이 성벽은 조선 태종 때 지어져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던 요새였다. 그토록 오랜 시간, 수많은 풍파를 견디며 이곳을 지켜온 비결은 무엇일까. 성벽의 거친 표면을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숨겨진 아픔, 그리고 빛의 기록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조명을 받은 성벽은 더욱 도드라졌다. 이 견고한 성벽이 품고 있는 또 다른 역사, 바로 조선 후기의 천주교 박해 이야기다.
수천 명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고초를 겪고 순교했다. 특히 성내의 회화나무(호야나무)는 그 아픈 역사의 증인으로 아직도 서 있다. 견고한 성벽이 누군가에게는 든든한 울타리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잔혹한 감옥이었으리라.

▲ 어둠과 빛의 경계에 선 성벽 끝의 누각. 아픈 역사와 평화로운 밤이 공존한다
김지영
어둠 속을 걷다 보니 먼 곳에 성벽 끝자락의 누각이 보였다. 어둠과 빛의 대비가 극명했다. 역사는 늘 광명과 어둠, 환희와 비극이 공존하는 법이다. 해미읍성은 그 두 얼굴을 모두 품은 채, 밤의 침묵 속에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역사적 용어보다는, 그저 그곳에 서서 느껴지는 묵직한 공기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돌 위에 새긴, 우리의 소박한 염원
성벽의 굴곡을 따라 빛의 길이 이어졌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성벽의 결이 야간 조명을 통해 새로운 표정을 드러냈다. 굴곡진 성벽의 곡선이 마치 우리의 삶처럼 느껴졌다.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고 들어간, 때로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곡선들이 모여 하나의 견고한 성벽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 성벽의 옹성 부분에 투사된 화려한 미디어파사드. 돌벽이 스크린으로 변신했다
김지영
그때였다. 성벽의 가장 깊숙한 곳, 마치 보루처럼 솟아오른 옹성(壅城) 부분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돌로 쌓은 성벽 위에 형형색색의 빛의 그림, 미디어파사드가 구현되고 있었다. 과거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그 견고한 돌 벽이, 이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크린이 되어 있었다.
성벽이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

▲ 어두운 성벽 위에 새겨진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라는 희망의 메시지
김지영
미디어파사드는 조선의 역사를 역동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아름다운 문양으로 성벽을 수놓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깊은 울림을 준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어두운 성벽 위에 노란색 빛으로 "해뜨는 서산,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 성벽은 더 이상 과거의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이자 응원이었다.
박해의 아픔을 품었던 그 돌벽 위에, 이제는 '건강'과 '행복'이라는 가장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염원이 새겨지고 있었다. 역사는 그렇게 과거를 품고 현재를 위로하며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며
미디어파사드의 빛이 꺼지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지만, 내 마음속에는 노란 빛의 메시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해미읍성을 나서며, 다시 한 번 진남문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서 있는 성벽이 아까보다 훨씬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 야경 관람을 마치고 나서는 길에 바라본 해미읍성의 밤 풍경
김지영
해미읍성은 하절기(3월~10월)에는 오전 5시부터 밤 9시까지, 동절기(11월~2월)에는 오전 6시부터 저녁 7시까지 문을 열어둔다. 게다가 입장료와 주차료마저 무료이니,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와 거닐기 좋다. 낮의 호젓한 산책도 좋지만, 일몰 후 은은한 야간 조명과 미디어파사드가 만들어내는 밤의 온기를 느껴보길 권한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늘 무언가에 쫓기고,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해미읍성의 성벽처럼, 우리도 각자의 삶의 곡선을 껴안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가끔은, 우리 삶의 어두운 벽 위에 누군가가 보내는 따뜻한 빛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다음번에는 해미읍성의 낮, 그 햇살 아래 숨 쉬는 또 다른 이야기를 기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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