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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화와 함께한 노래, 국민들은 왜 배신감 느꼈나

    [노래로 읽는 현대사] 독립투사의 노래에서 친일의 흔적으로 <선구자>

    등록 2026.09.04 07:15수정 2026.09.04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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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노래에도 스며든다. 사람들은 전쟁과 가난을 견디며 노래했고, 격변하는 시대에 흔들리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가 태어나고 불리고, 때로는 전혀 다른 운명을 맞는 동안 우리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라가 본다. 노래를 부른 사람들, 노래가 불린 시대를 들여다보며 한국 현대사를 풀어내고자 한다.[기자말]
    대학 노래패에 처음 들어갔을 때 신기했던 게 '노래책'이었다. 노래패 동아리 이름 '노래얼'이라는 제목의 노래책에는 수백 곡의 노래가 들어 있었는데 대부분 듣도 보도 못한 노래들이었다. "메마른 이 강산을 적의 피로 물들이자"(민족해방가1) 따위의 '시뻘건' 노래들을 내가 어디서 감히 접해 보았겠는가. 그래도 간간이 아는 노래가 있어 반갑게 흥얼거리며 노래와 인사하곤 했다. 그중 하나가 가곡 <선구자>였다.

    노래 악보 밑에는 짤막한 노래 설명이 달려 있었다.


    "1933년 북만주 모란강 서장안가의 어느 여관에 있는 작곡가 조두남의 방에 윤해영이란 독립투사가 찾아와 가사를 주면서 작곡을 부탁하고 일주일 후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조두남은 5일 만에 작곡을 완성하고 '용정의 노래'라는 제목까지 붙이고 기다렸으나 그는 영영 오지 않았다."

     1988년 당시 동아리 노래책에는 <선구자>가 이렇게 소개돼 있었다.
    ▲ 1988년 당시 동아리 노래책에는 <선구자>가 이렇게 소개돼 있었다. 김형민

    이 글귀는 실로 아련하고도 뭉클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영화의 한 장면 아닌가.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사라지는 독립운동가. 공들여 노래를 짓고 해란강 강변에서 목청껏 불러보는 작곡가. 약속한 날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 누굴 암살하려다 체포됐을까. 밀정의 손에 죽었을까. 마적 떼라도 만났을까.

    조두남의 생전 회고 또한 그 상상에 후광을 보탰다.

    "나는 이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윤씨의 눈빛은 침착하고 강렬했으며 깊은 신념과 의지가 담겨 있어서 아무리 보아도 장사하는 사람의 눈빛은 아니었다.…윤해영은 그토록 바랐던 해방이 된 지금 어느 차가운 땅속에서 이 기쁨을 누릴까?"(수상집 <그리움>, 조두남, 세광출판사)

    해방 이후 조두남은 2·3절 가사를 바꿔 '조국 해방을 목 놓아 부르는' 가곡 <선구자>로 완성시켜 내놓는다. 윤해영의 원가사에는 "눈물 젖은 보따리"나 "흘러 흘러 들어온 신세" 등 유랑민의 슬픔이 담겨 있었는데 이를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등으로 바꾸고 제목을 <선구자>로 못 박은 것도 조두남이었다(1976년 4월 24일 <경향신문>).


    이 노래가 널리 알려진 것은 작곡 후 30여 년이 지나서였다. 1963년 서울 시민회관 송년음악회에서 바리톤 김학근이 노래한 것을 기독교방송이 녹음해 <정든 우리 가곡>의 시그널 음악으로 7년 동안 사용하면서 <선구자>는 '국민가곡'으로 부상한다.

    역사를 바꾸고자 뛰어든 사람들의 주제가


    "'옥떨메'란?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호걸'이란? 호떡집 걸레" 류의 70년대 대학생들의 말줄임 유머 가운데 '선구자'도 있었다. '선천적 구제불능 자아도취자'. 요즘 말로 하면 '관종'. 관종에 대한 모든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움직여가는 이들은 항상 방관자보다는 관종 쪽일 것이다. <선구자>는 스스로 떨쳐 일어나 역사를 바꾸고자 뛰어든 사람들의 주제가였다.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이들에게도 <선구자>는 눈물샘을 터뜨리고 목구멍을 뜨겁게 하는 노래였다. 1975년 유신체제에 항거하며 죽어간 서울대생 김상진의 장례식에서 추모객들은 그가 즐겨 부르던 <선구자>를 목 놓아 불렀다. 1979년 부마항쟁에서, 1980년 '서울의 봄'에 서울역을 메운 10만 학생들 사이에서, 1986년 민주교육실천대회의 교사들 사이에서도 울렸다. 1987년 6월의 명동성당과 그 뒤의 노동자대투쟁 현장에서도 <선구자>는 가곡이기 이전에 가장 널리 알려진 '민중가요'였다.

     1987년 6월 12일 서울 명동성당 앞마당에서 철야농성중인 학생들이 행동방향을 둘러싸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선구자>는 널리 불린 '민중가요' 중 하나였다.
    ▲ 1987년 6월 12일 서울 명동성당 앞마당에서 철야농성중인 학생들이 행동방향을 둘러싸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선구자>는 널리 불린 '민중가요' 중 하나였다. 연합뉴스

    해외로 흩어진 '코리아 디아스포라'에도 이 노래는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1994년 7월 11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브라질 동포 위문 가요무대가 그랬다. 이미자는 "노래를 부르다 쓰러져도 좋다"며 13곡이나 불렀고 다른 가수들도 교포들의 향수를 달랬다. 절정은 <선구자> 합창이었다.

    이 가요무대를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보는데 <선구자> 전주가 흘러나오면서 김동건 아나운서의 한마디가 쩌렁쩌렁 울렸다. "여러분이 바로 선구자입니다!" 그 한마디가 현장의 분위기를 하늘로 끌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누가 선창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날은 그저 대합창이었다.

    브라질 교포들 가운데 해란강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겠지만 해란강이든 아마존강이든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강가에서 말을 달리든 소를 치든 뭐가 달랐겠는가. 어떤 이유로든 모국을 떠나 험난한 타국에서 삶을 개척하고 하루하루를 여닫아야 했던 그들은 모두 선구자였던 것을. 어떤 이유로든 모국을 떠나 험난한 타국에서 삶을 개척해야 했던 그들은 모두 선구자였던 것을. 교포들은 울고 웃었다. 눈물을 흘리며 웃었고, 미소 지으며 통곡했다.

    보전할 것과 치울 것 사이의 간극

    하지만 그 대합창이 이뤄지던 즈음 이미 <선구자>는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조두남과 윤해영의 친일 행적이 밝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두남은 해방 전까지 만주에서 '징병령 만세' 등 친일 가요를 작곡했고 윤해영은 만주국의 대표적 친일 단체인 오족협화회의 간부로 활동하며 여러 편의 친일시를 썼다.

    심지어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생면부지의 독립투사가 내밀고 간 노랫말과 영영 돌아오지 않은 그 사람'의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은 시기 만주국에서 활동하던 윤해영을 '찾아 헤맸는데 만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윤해영의 친일시 '낙토만주'는 배신감을 더했다. "오색기 너울너울 낙토만주 부른다/(중략)/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 오색기는 만주국의 국기다.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가 '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로, 똑같은 '선구자'가 정반대 이미지로 바뀌는 데서 '우리에게 신화처럼 남아 있는 윤해영이 설마 이럴 수 있을까'하는 잔인한 배신감"은 이들의 친일 행적을 연구한 문학평론가 오양호만의 소회가 아니었다.

    이후 <선구자>는 대한민국 대표 가곡의 지위를 잃었다.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전두환의 해외순방 환영 현장에서 극과 극의 무대를 가리지 않고 울렸던 노래는 이제 공식적으로 불리는 기회가 거의 사라졌다. 누가 "이~~일송정 푸우른 솔은" 하고 운을 떼면 "그거 친일파 노래 아니냐"는 핀잔이 날아오기 십상이다. 해란강 주변의 <선구자> 기념석 글자는 뭉개졌고, 2003년 마산의 조두남 기념관 개관식에서는 시장이 시민단체가 던진 밀가루를 뒤집어썼다.

     2003년 5월 29일 마산시 신포동 구항근린공원 내에 건립된 조두남 기념관 개관식에서 황철곤 마산시장이 시민단체로부터 밀가루 세례를 받자 공무원들이 옷으로 감싸고 있다.
    ▲ 2003년 5월 29일 마산시 신포동 구항근린공원 내에 건립된 조두남 기념관 개관식에서 황철곤 마산시장이 시민단체로부터 밀가루 세례를 받자 공무원들이 옷으로 감싸고 있다. 윤성효

    수십 년 속아왔던 배신감은 충분히 이해한다. <친일파의 한국현대사>를 쓴 정운현은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직도 공식 석상에선 그의 전력을 들어 바그너의 곡 연주를 금하고 있다"며 조두남의 이름이 바그너에 비기겠느냐고 통탄했다. 알고 지내던 성악가 한 명은 <선구자>를 애창곡으로 불렀던 과거를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켕기는 대목이 있다.

    조두남과 윤해영이 친일파로 돌아섰다고 해서 - 윤해영은 민족시인이기도 했고 해방 후 북한에서는 김일성 찬양 시인이기도 했다 - 그 사실을 규명하고 기억하는 것을 넘어 노래까지 말소하는 것이 지당한 것인지, 세상에 널리 불린 60년 동안 그 노래에 서린 우리의 뜨거운 추억과 그리운 기억, 숱한 사연들마저 역사에서 소거해야 하는지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선구자라는 말 자체가 일본식 단어이며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었으면 그런 단어들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이 아니다. '선구자'는 1933년 이전 조선의 언론과 글에 수없이 등장한다. 친일 문제를 '단죄의 언어'로만 처리할 때 생기는 역설이다. '친일 청산'을 제대로 했다고 평가받는 북한의 준 국가라 할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한 이찬 역시 친일시를 여럿 발표했다. 민족정기 수호를 위하여 북한도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폐기하는 것이 옳을까.

    역사 속에서 창작자의 삶이 뒤틀렸을 때 우리는 그를 어디까지 수용하고 어디부터 배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지하가 만년에 추한 모습을 보였다고 그의 시를 노랫말로 만든 노래들을 다 폐기할 수 없는 것처럼, 친일 작곡가들이 지은 노래라 하여 그들을 송두리째 우리 역사에서 치워버릴 수 있을까.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또 보전할 수 있는 것과 치울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은 얼마인가. <선구자>는 우리 역사에 여러 갈래의 질문을 지금도 던지고 있다. 선구자는 아직도 '거친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선구자 #조두남 #친일청산 #윤해영 #국민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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