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6월 12일 서울 명동성당 앞마당에서 철야농성중인 학생들이 행동방향을 둘러싸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선구자>는 널리 불린 '민중가요' 중 하나였다.
연합뉴스
해외로 흩어진 '코리아 디아스포라'에도 이 노래는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1994년 7월 11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브라질 동포 위문 가요무대가 그랬다. 이미자는 "노래를 부르다 쓰러져도 좋다"며 13곡이나 불렀고 다른 가수들도 교포들의 향수를 달랬다. 절정은 <선구자> 합창이었다.
이 가요무대를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보는데 <선구자> 전주가 흘러나오면서 김동건 아나운서의 한마디가 쩌렁쩌렁 울렸다. "여러분이 바로 선구자입니다!" 그 한마디가 현장의 분위기를 하늘로 끌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누가 선창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날은 그저 대합창이었다.
브라질 교포들 가운데 해란강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겠지만 해란강이든 아마존강이든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강가에서 말을 달리든 소를 치든 뭐가 달랐겠는가. 어떤 이유로든 모국을 떠나 험난한 타국에서 삶을 개척하고 하루하루를 여닫아야 했던 그들은 모두 선구자였던 것을. 어떤 이유로든 모국을 떠나 험난한 타국에서 삶을 개척해야 했던 그들은 모두 선구자였던 것을. 교포들은 울고 웃었다. 눈물을 흘리며 웃었고, 미소 지으며 통곡했다.
보전할 것과 치울 것 사이의 간극
하지만 그 대합창이 이뤄지던 즈음 이미 <선구자>는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조두남과 윤해영의 친일 행적이 밝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두남은 해방 전까지 만주에서 '징병령 만세' 등 친일 가요를 작곡했고 윤해영은 만주국의 대표적 친일 단체인 오족협화회의 간부로 활동하며 여러 편의 친일시를 썼다.
심지어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생면부지의 독립투사가 내밀고 간 노랫말과 영영 돌아오지 않은 그 사람'의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은 시기 만주국에서 활동하던 윤해영을 '찾아 헤맸는데 만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윤해영의 친일시 '낙토만주'는 배신감을 더했다. "오색기 너울너울 낙토만주 부른다/(중략)/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 오색기는 만주국의 국기다.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가 '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로, 똑같은 '선구자'가 정반대 이미지로 바뀌는 데서 '우리에게 신화처럼 남아 있는 윤해영이 설마 이럴 수 있을까'하는 잔인한 배신감"은 이들의 친일 행적을 연구한 문학평론가 오양호만의 소회가 아니었다.
이후 <선구자>는 대한민국 대표 가곡의 지위를 잃었다.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전두환의 해외순방 환영 현장에서 극과 극의 무대를 가리지 않고 울렸던 노래는 이제 공식적으로 불리는 기회가 거의 사라졌다. 누가 "이~~일송정 푸우른 솔은" 하고 운을 떼면 "그거 친일파 노래 아니냐"는 핀잔이 날아오기 십상이다. 해란강 주변의 <선구자> 기념석 글자는 뭉개졌고, 2003년 마산의 조두남 기념관 개관식에서는 시장이 시민단체가 던진 밀가루를 뒤집어썼다.

▲ 2003년 5월 29일 마산시 신포동 구항근린공원 내에 건립된 조두남 기념관 개관식에서 황철곤 마산시장이 시민단체로부터 밀가루 세례를 받자 공무원들이 옷으로 감싸고 있다.
윤성효
수십 년 속아왔던 배신감은 충분히 이해한다. <친일파의 한국현대사>를 쓴 정운현은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직도 공식 석상에선 그의 전력을 들어 바그너의 곡 연주를 금하고 있다"며 조두남의 이름이 바그너에 비기겠느냐고 통탄했다. 알고 지내던 성악가 한 명은 <선구자>를 애창곡으로 불렀던 과거를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켕기는 대목이 있다.
조두남과 윤해영이 친일파로 돌아섰다고 해서 - 윤해영은 민족시인이기도 했고 해방 후 북한에서는 김일성 찬양 시인이기도 했다 - 그 사실을 규명하고 기억하는 것을 넘어 노래까지 말소하는 것이 지당한 것인지, 세상에 널리 불린 60년 동안 그 노래에 서린 우리의 뜨거운 추억과 그리운 기억, 숱한 사연들마저 역사에서 소거해야 하는지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선구자라는 말 자체가 일본식 단어이며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었으면 그런 단어들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이 아니다. '선구자'는 1933년 이전 조선의 언론과 글에 수없이 등장한다. 친일 문제를 '단죄의 언어'로만 처리할 때 생기는 역설이다. '친일 청산'을 제대로 했다고 평가받는 북한의 준 국가라 할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한 이찬 역시 친일시를 여럿 발표했다. 민족정기 수호를 위하여 북한도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폐기하는 것이 옳을까.
역사 속에서 창작자의 삶이 뒤틀렸을 때 우리는 그를 어디까지 수용하고 어디부터 배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지하가 만년에 추한 모습을 보였다고 그의 시를 노랫말로 만든 노래들을 다 폐기할 수 없는 것처럼, 친일 작곡가들이 지은 노래라 하여 그들을 송두리째 우리 역사에서 치워버릴 수 있을까.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또 보전할 수 있는 것과 치울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은 얼마인가. <선구자>는 우리 역사에 여러 갈래의 질문을 지금도 던지고 있다. 선구자는 아직도 '거친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5
공유하기
민주화와 함께한 노래, 국민들은 왜 배신감 느꼈나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