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를 들고 선 엘리자베스 쉐핑' 1930년 뉴욕에서 찍은 서서평 선교사의 독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블랙만 포토 서비스'는 뉴욕 롱아일랜드의 햄스테드라는 동네에 있었는데, 이곳은 서서평의 어머니 안나가 살던 미네올라와도 가까웠다.
Pearl Digital Collection
일제 강점기, 뉴욕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여성 선교사
그간 여러 번 보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서서평 선교사의 흑백 사진. 파란 눈의 미국 여성 선교사 서서평은 조선 여인처럼 입고, 된장국을 먹고, 포대기로 아이를 업어주며 고무신을 신고 생활했고, 담요 한 장조차 반으로 찢어 걸인과 나눠 가졌다. 조선의 어머니, 빈자의 어머니라 불리면서.
그래서 한복을 입고 있는 이 사진 역시 조선 어딘가에서 찍은 사진이려니 했었다. 그런데 '뉴욕(1930년)'에서 찍었다는 설명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뉴욕에서 훈련받은 간호사(RN) 출신인 서서평은 1912년, 32세의 나이에 조선에 왔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꾸준히 간호사를 양성하며 '조선 간호부(현, 대한간호협회)'도 설립했다. 1929년, 국제간호사협의회(ICN)에 '조선 간호부'를 회원으로 가입시키고자 캐나다 몬트리올에 방문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이후 1년 정도 캐나다와 미국에 머물렀다. 22년의 조선 선교 활동 중에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안식년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혹시 우리 동네 롱아일랜드에서 찍은 것일까. 서서평 선교사가 안식년을 보내던 1930년 무렵, 롱아일랜드에도 조선을 비롯한 외국 선교를 후원하던 교회들이 있었고, 선교사들은 교회를 방문해 선교 보고를 하기도 했다. 사진의 최초 저작자는 '블랙만 포토 서비스(Blackman Photo Service)'.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장로회 역사 자료실에 문의해 보니 그곳은 지금은 폐업한 롱아일랜드 햄스테드에 있는 스튜디오였다. 서서평 선교사의 어머니도 롱아일랜드 미네올라(Mineola)에 살았다. 두 곳 모두 우리 집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다. 사진 배경도 롱아일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원주택의 정원같이 보였다.
비록 어머니를 뵙지는 못했지만, 친구나 가까운 지인을 방문했다가, 혹은 선교 보고를 위해 차려입었다가 사진을 찍게 된 건 아닐까.
롱아일랜드의 유서 깊은 장로 교회 몇 곳에 연락해 보았다. 안타깝게도, 1930년경 선교 보고 기록이 있다는 교회에서조차도 어느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였는지 알 수 없고, 쉐핑이라는 이름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답신만 받았다.
서서평 선교사는 "어머니가 나를 쫓아내며 내 얼굴 앞에서 문을 닫아버렸다"라고 직접 회고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어머니는 왜 그렇게 딸을 모질게 내쳤을까.
어머니 안나는 미혼모였다. 친정어머니에게 네 살 엘리자베스를 맡기고, 독일을 떠나 뉴욕으로 홀로 이주했다. 아홉 살 무렵, 키워주시던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엘리자베스는 어머니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왔다고 한다.
어머니 안나는 어린 딸을 버렸던 걸까. 미혼모가 서너 살 된 딸까지 데리고 낯선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정착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안나는 뉴욕에서 결혼해 새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주소를 독일에 전했다. 딸을 저버리고 종적을 감출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딸 엘리자베스는 뉴욕에서 어머니와 재회한 후 가톨릭 사립 미션스쿨에서 교육받았고, 간호학교(St. Mark's Hospital Nursing School, 현 뉴욕시립간호대) 과정을 수료하며 정식 간호사(RN)가 되었다. 여성이 공교육을 받기도 힘들었고 교사나 간호사 같은 한정된 직업에 겨우 진출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 안나는 적어도 이민 신분이나 교육 면에서 딸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하지만 딸 엘리자베스의 갑작스러운 개신교 개종과 선교사 훈련, 조선으로의 출국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안나에게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뉴욕에 있었다면 간호사로 평탄한 삶이 보장되어 있을 딸이었다. 어머니는 문밖으로 딸을 내쫓았고, 연을 끊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딸과 멀어져 있던 어머니 안나 앞에 '거지꼴'을 한 엘리자베스, 아니 서서평이 된 딸이 찾아왔다. 1930년 여름이었다. 안나는 그런 모습이라면 만나지 않겠다는 강경한 뜻을 전했다. 그때가 모녀가 '지척'에 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불과 5년이 지나지 않아 딸인 서서평이 광주에서 먼저 소천(1934년)했고, 이듬해 뉴욕에 있던 어머니 안나도 세상을 떠났다(1935년).
서서평은 첫 광주 시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수많은 군중이 상여 뒤를 따르며 '어머니'라 목 놓아 울었다. 조선이 사랑하던 어머니로, 조선이 존경하던 스승으로 딸이 먼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이가 있었을까. 아니면 끝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딸을 잃었다'고만 생각하며 어머니 안나도 세상을 떴을까.
엄마가 되고 보니, 어머니 안나의 문전박대는 딸을 버렸다기보다 어쩌면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아니었을지 조심스럽게 헤아려보게 된다.
어머니 안나의 묘소를 찾아서

▲홀리루드 공원묘지 서서평 선교사의 어머니 안나의 묘비가 있는 뉴욕 롱아일랜드 웨스트버리 소재 홀리루드 공원묘지
장소영
웨스트버리 가까이에 있는 오래된 가톨릭 공원묘지 홀리루드(Cemetery of the Holy Rood)에서부터 어머니 안나의 묘소를 찾기 시작했다.
워낙 큰 터인 데다 유서 깊은 성당(St. Brigid Catholic Church)에서 잘 관리하는 묘원이라 홈페이지 검색 기능을 통해 쉽게 조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나 쉐핑으로 홀리루드를 비롯한 인근의 여러 묘원을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자료를 통해 어머니의 이름이 '안나 슈나이더(Anna M. Schneider)'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혼 증명서와 여권 발행도 '안나 슈나이더'로 승인받았다. 다시 홀리루드 공원묘지에서부터 검색을 했다.
안나 슈나이더의 이름이 바로 나타났다. 수년 동안 닳도록 다녔던 길, 큰아이가 일하는 사무실 바로 길 건너였다.
지난 8일, 서서평 선교사를 낳고 길러 준 어머니 안나 슈나이더의 묘비를 딸과 함께 찾아갔다. 약 100년 전 이맘때, 서서평 선교사는 어머니에게 두 번째 외면을 받고 이 동네를 떠나 조선으로 출국했다.

▲안나의 가족묘 홀리루드 묘원 내 슈나이더 가족묘이다. 묘원을 관리하는 성 브리기드 성당의 일원이 아니더라도 묘원에 등록하고 장례가 가능하다는 설명만 들었다. 서서평 선교사의 어머니 안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딸을 가톨릭 학교에서 교육시켰다.
장소영
어머니 안나의 묘비에는 다른 가족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가족묘인 셈이다. 어머니로서는, 딸이 독일계의 긍지와 가톨릭 신앙의 유산을 지키며 간호사로서 봉사하고 뉴욕에서 평탄하게 살길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비록 어머니의 기대는 저버렸지만, 그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상상도 못 할 일을 따님이 해냈다고 묘비 앞에서 말씀드렸다.
어머니 안나는 딸과 절연했지만, 딸 서서평은 이름도 없던 조선 여인들에게 이름을 주고, 교육하고, 14명이나 되는 입양아와 38명의 과부를 거둬 함께 살았다. 한국 교회에 '성미제도'(쌀을 모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눔)를 최초로 시행하기도 했다.
어머니 안나가 딸을 교육하고 간호사로 키워냈다면, 딸 서서평은 조선의 딸들을 교육하고, 고아원을 열고, 간호사를 양성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 이일학교(Neel Bible School, 현 한일장신대)를 세웠다. 일제의 탄압에도 한글 교육과 한글 문서 출판을 포기하지 않았고, 애국애족의 정신도 길러 주었다.
일제가 한센 환자에게 강제정관수술을 시행하는 등 인권유린 정책을 추진하자, 서서평 선교사는 동료 목회자와 한센인 50여 명과 함께 서울까지 행진해 갔다. 소문을 듣고 500여 명이 총독부 앞에 몰려와 합심해 항의하자, 일제는 정책을 취소하고 한센 전문 치료처를 약속했다. 소록도 갱생원의 시작이었다. 뉴욕에서조차 한센인에게 강제 격리와 불임 시술 같은 시민권 강제 제한을 가하던 시대였다.
서서평 선교사의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따님은 여전히 한국에서 존경받고 있다고, 나와 지금 곁에 선 딸아이도 서서평 선교사의 열매라고 마무리 인사를 드렸다.

▲성브리기드 성당(St. Brigid Church) 전경 웨스트버리를 처음 개간하고 마을 이름을 붙인 것은 퀘이커교도였다. 이후 역사의 변곡을 거쳐 1850년대에 성브리기드 성당이 건축되었고 차례로 재건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또한 성당 길 건너에 소속 가톨릭 학교도 있다. 1900년대 엘리자베스 쉐핑이라는 학생의 이름은 확인할 수 없었다. 서서평은 9세에 어머니를 찾아 독일에서 뉴욕으로 온 뒤 가톨릭 재단의 미션 스쿨을 다녔다.
장소영
"엄마, 하늘에서 이미 다 아시지 않겠어요? "
딸의 말에 그저 같은 엄마로서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나는 한국계 이민자의 긍지를 가지고 있는 개신교 신앙인이다. 만약 서서평 선교사처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의 삶을 살겠다고 다른 사람이 걷지 않는 위험한 길을 아이들이 선택한다면 나는 과연 찬성하고 지지해 줄 수 있을까. 부디 그때 나도 아이들과 같은 시선을 가지게 되길 바랄 뿐이다.

▲뉴욕 롱아일랜드 웨스트버리 홀리루드 묘원(Cemetery of the Holy Rood) PLOT #3 지역에 서서평 선교사의 어머니 안나의 가족묘가 있다. 911 희생자 묘소 옆이라 쉽게 찾을 수 있다.
장소영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
공유하기
"어머니"로 불렸던 외국인... 광주 사람들 목놓아 울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