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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영장 '1번 레인'이 가르쳐준 삶의 덕목

    '조진조퇴'의 세상에서 내 페이스로 오래 헤엄치는 법

    등록 2026.08.26 16:35수정 2026.08.2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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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수영장에는 눈에 보이는 위계와 보이지 않는 위계가 함께 있습니다.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중급반 안에서도 1번 레인에서 2번 레인으로 자리를 옮기는 건 제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승인해야 합니다.


    "회원님, 이번 달부터 2번 레인으로 가세요."

    이 한마디에 레인을 한 칸 옮길 때마다, 저는 회사에서 승진 발령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종류의 뿌듯함을 느낍니다. 겨우 레인 하나 옮긴 것뿐인데 말이죠.

    그런데 이 위계에는 아무도 정해주지 않는 빈틈이 하나 있습니다. 같은 레인 안에서 누가 먼저 출발할 것인가 하는 순서입니다. 이건 순전히 회원들 간의 눈치로, 그러니까 누구도 규칙으로 적어두지 않았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지키는 합의로 정해집니다. 대개는 그 레인에서 가장 오래 다녀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이 1번 영자로 나섭니다. 오늘 처음 등록한 사람이 첫날부터 그 자리에 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 적 없는데, 레인마다 이런 질서는 마치 물 흐르듯 저절로 만들어집니다.

    저는 이 소리 없는 위계 앞에서 매일 아침 조용히 주변을 살핍니다. 굳이 애써 1번 자리를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그 자리가 오늘의 저에게 맞는 자리인지 아닌지를 수영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넘도록 몸과 눈치로 배웠습니다.

    1번 영자에게는 몇 가지 분명한 덕목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청취력입니다. 선생님은 대개 두 레인을 동시에 지도하기 때문에, 한쪽에서 드릴을 지시하고 다른 쪽에서 연습을 시키는 식으로 번갈아 강습을 진행합니다. 갈 때는 접영 킥에 평영 손, 올 때는 자유형으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한 번에 정확히 알아듣고 첫 번째로 출발해야 합니다. 앞사람이 잘못 알아들으면 뒷사람들은 순식간에 우왕좌왕합니다. 접영 킥에 접영 팔을 해버리면 뒤에서는 곧바로 낮은 웅성거림이 번집니다. 저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일단 앞사람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고, 굳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째는 기억력입니다. 첫 바퀴는 가볍게 돌더라도 두 번째 바퀴에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세 번째 바퀴에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에도 내가 지금 몇 바퀴째 돌고 있는지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물속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쉽게 흩어집니다. 숨도, 순서도, 자존심마저도요.


    셋째는 실력과 배려입니다. 첫 번째 출발자는 뒷사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물살을 가릅니다. 그 뒷모습은 누군가에게는 비교의 대상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오늘 따라야 할 기준이 됩니다. 그렇다고 혼자 잘 나간다고 뒷사람과의 간격을 무시한 채 제 레이스만 끝내버리면, 뒤이어 출발할 사람에게 고스란히 그 부담이 넘어갑니다. 너무 빨라도, 너무 느려도 안 되는 자리. 그것이 1번입니다.

    흥미로운 건, 실력이 좋으면서도 굳이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마냥 미덕은 아닙니다. 잘하는 사람이 뒤에서 출발하면, 아무리 거리를 두어도 결국 앞사람의 발끝에 닿게 됩니다. 앞사람은 뭔가 스치는 감각에 흐름이 끊기고, 잘 가다가도 중간에 멈칫하게 됩니다. 배려랍시고 물러난 자리가 오히려 남에게는 부담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잘하는 사람은 부끄러워 말고 앞에 서고, 아직 부족한 사람은 눈치 볼 것 없이 뒤에 서는 편이 서로에게 낫습니다. 오래 다닌 터줏대감이라도 그날 컨디션이 안 좋으면 조용히 뒤로 물러나고, 아직 신참이라도 몸이 가벼운 날이면 앞으로 나서는 유연함. 저는 이게 이 작은 세계가 가진, 꽤 정교한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물속의 눈치는 지상의 직장 생활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조직에도 당연히 위계가 있습니다. 누가 지시를 내리고 누가 따를지는 직급이라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일이 틀어지고 책임을 물어야 할 순간, 누가 먼저 나서서 총대를 메고 누가 뒤에서 그를 받쳐줄지는 어떤 조직도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건 오직 그 자리에 선 사람의 눈치와 용기의 몫입니다.

    저 역시 신입 시절엔 무조건 앞장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에 서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조진조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습니다. 조기 진급이 조기 퇴사로 이어지는 경우를 20년 넘는 직장 생활 동안 적지 않게 지켜봤습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요. 열흘 붉은 꽃이 없듯, 오늘의 스포트라이트가 내일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너무 일찍 앞자리에 올라선 이일수록 훗날 내려올 때의 낙차가 컸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생각합니다. 화려한 1번도 좋지만, 꾸준하고 성실한 2번과 3번도 그만큼 좋다고요.

    수영장의 1번 영자에게 청취력과 기억력과 배려가 필요하듯, 조직의 앞자리에도 똑같은 덕목이 필요합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의 맥락을 정확히 읽어내는 청취력, 힘든 순간에도 처음의 원칙을 놓치지 않는 기억력, 그리고 무엇보다 뒤따르는 사람과의 간격을 헤아리는 배려. 이 세 가지가 없는 사람이 앞자리에 서면, 수영장 레인이 그렇듯 조직 전체가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반대로 실력이 있으면서도 매번 뒤로만 숨는 사람도 곤란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 지나친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앞사람의 흐름을 자꾸 건드리며 방해가 되기도 하니까요. 결국 중요한 건 앞이냐 뒤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서야 할 자리를 정확하게 알고 꾸준하게 나아가는 일입니다.

    돌이켜보면 눈치라는 단어에는 조금 억울한 구석이 있습니다. 흔히 눈치를 본다고 하면 소심하고 비굴한 이미지부터 떠올립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눈치란 결국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는 능력이고, 그 능력의 다른 이름은 배려입니다. 앞사람의 속도를 살펴 팔 젓는 박자를 늦추고, 뒷사람의 숨소리를 느껴 발차기에 힘을 더하는 것도 다 눈치입니다.

    말 한마디 없이도 그 무수한 눈치들이 모여 레인 전체의, 그리고 조직 전체의 질서를 조용히 만들어냅니다. 눈치가 없으면 오히려 모두가 삐걱거립니다. 그러니 눈치를 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이들에 대한 가장 작고도 확실한 예의일지 모릅니다.

     내년에 내 호흡과 페이스로 건너야 할 한강의 물결입니다
    ▲ 내년에 내 호흡과 페이스로 건너야 할 한강의 물결입니다 문현호

    한강 횡단을 앞둔 지금, 이 눈치는 더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참조할 가이드 레인이 없는 야생의 강물에서는 앞서가는 조급함보다 물살과 유속, 그리고 내 폐활량의 상태를 정직하게 읽어내는 눈치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앞선 이의 물길을 고맙게 따르고 뒤따르는 이와 거리를 맞추며 나아갈 때 비로소 반대편 둔치에 닿을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도 제 숨의 길이에 맞는 자리에 서서 물안경을 고쳐 씁니다. 남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내 박자로 물을 가르는 꾸준함이, 수영장에서도 직장에서도 저를 완주하게 만드는 가장 다정한 눈치일 겁니다. 물론 언젠가 제 차례가 온다면, 그때는 기꺼이 1번에 서서 담담히 물속으로 뛰어들 생각입니다.
    #수영 #한크스 #지천명 #눈치 #직장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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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투리는 여전하고, 마음 한켠엔 늘 바다가 있습니다. 서울 하늘 아래 걷고 있지만, 그리움은 늘 남쪽을 향합니다. 조용한 산책길과 사소한 감탄 속에서 느리게, 그러나 단단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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