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유학생의 이름 나이마노바 울잔의 이름 풀이
오마이뉴스
'성 하나, 이름 하나'라는 전제
그날 나는 이름을 외우는 법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한국의 출석부와 신청서가 전제하는 '성 하나, 이름 하나'의 질서 밖에 서 있는 이름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행정안전부 예규 제303호 '외국인의 성명 표기에 관한 표준'이 2024년 11월 22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로마자 성명은 성-이름 순으로 대문자로 쓰고 성과 이름을 띄어 쓴다. 이름이 여러 단어인 경우에는 그 사이에도 띄어 쓸 수 있다. 한글 성명은 성-이름 순으로 쓰되 붙여 쓴다. 정부가 든 예시가 'SAWYER TOM(소여톰)'이다. 표기의 출처는 외국인등록증 등 출입국 관련 문서를 우선하고, 없으면 여권의 기계판독영역을 따른다. 기관마다 제각각이던 표기를 정리한 것은 분명 진전이다.
원칙도 예시도 출처도, 모두 이름을 성과 이름으로 나눌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로마자 이름 안의 여러 단어는 띄어 쓸 수 있어도, 한글로 옮겨지는 순간 그 경계는 다시 붙는다.
그 전제를 벗어나는 이름에는 세 가지 일이 벌어진다.
첫째, 잘못 나뉜다. 최근 미국의 소비자 문제 전문 매체 <엘리엇 리포트>가 지난 7월 전한 사례가 그렇다. 토론토에서 델리로 가려던 승객 사우라브 쿠마르의 여권에는 이름 칸에 'Saurabh Kumar'가 통째로 적혀 있고 성 칸은 비어 있었다. 예약 사이트가 성을 요구하자 그는 'Saurabh'를 이름으로, 'Kumar'를 성으로 나눠 적었다. 공항에서는 그 나눔이 여권과 다르다는 이유로 탑승을 거부했다. 그는 급히 다른 표를 사야 했고, 환급을 받고도 1000달러 넘게 물어냈다.
둘째, 경계가 지워진다. 성과 이름 두 칸만 두는 개별 서식에서는 가운데 토막을 따로 보이게 할 자리가 없다. 호바오투이린이 그런 서식에 이름을 적으면, 외할아버지의 함자인 '바오'는 이름 전체 안에 남더라도 원래의 자리를 잃는다. 가운데 토막을 성과 이름 어디 쪽에 붙일지는 담당자와 시스템이 정한다.
한글 표기도 마찬가지다. 로마자로는 HỒ BẢO THÙY LINH처럼 나뉘어 보이는 이름이 한글로는 호바오투이린이 된다. 성과 이름 사이뿐 아니라 이름 안에 있던 가족의 기억과 개인 이름의 자리도 모호해진다.
셋째, 바뀐다. 우리 표준이 근거로 삼는 여권 기계판독영역은 이름을 주식별자(primary identifier)와 부식별자(secondary identifier)로 나눈다. 흔히 앞이 성, 뒤가 이름이다. 그런데 국제 규격은 주식별자만 있는 이름도 허용한다. 성이 없는 사람의 이름은 통째로 주식별자 자리에 들어간다. 그 이름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성=주식별자, 이름=부식별자'라고 단순화하는 서식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 여권의 구분을 성과 이름의 구분으로 그대로 옮기는 시스템에서는, 셉티아나 하비바나 묘테인쪼도 성만 있고 이름이 없는 사람으로 표시될 수 있다.
이 연재의 1화에서 나는 귀화하는 동포가 성과 본을 새로 '창설'해야 하는 사정을 썼다. 수백 년 이어 온 경주 최씨가 대림동 최씨가 되는 일 말이다. 나누고 지우고 바꾸는 일은 국경 밖의 사정이 아니다.
띄어 쓰고 끊어 읽기
그날 강의실에는 아직 소개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유일한 한국인 학생 박다솜이다. '다솜'은 사랑이라는 뜻의 옛말이라고 했다. 익숙해서 뜻을 물어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종류의 이름이었다.
아홉 명의 소개가 끝나자 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교수님 이름도 소개해 주세요."
나의 이름은 어머니가 지었다. 은하, 은빛 노을이다. 학생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기가 수월해졌다. 어디까지가 성이고 어디부터가 이름인지, 이 사람은 이름의 어느 토막으로 불리기를 바라는지 알게 되었을 뿐이다. 레티탐은 '탐'으로, 호바오투이린은 '린'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묘테인쪼는 넉 자를 다 불러 달라고 했다.
한글 맞춤법에도 길이 있다. 제48항은 성과 이름을 붙여 쓰라고 하면서 단서를 달아 두었다. "성과 이름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띄어 쓸 수 있다." 남궁 억, 독고 준, 황보 지봉처럼 성과 이름의 경계가 혼동될 수 있는 경우를 위한 예외다. 두 음절짜리 성처럼 경계가 잘 보이지 않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국어 규범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행안부 예규는 외국인의 한글 성명을 성과 이름 순으로 붙여 쓰도록 할 뿐, 그 경계를 드러내기 위한 띄어쓰기 가능성은 따로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규가 적용되는 곳은 '민원 처리에 관한 법률'이 정한 행정기관이다. 대학의 출석부는 거기 들어가지 않는다. 규정을 바꾸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라는 얘기이다.
공식 문서에는 여권에 적힌 이름 전체를 그대로 보존하되, 출석부에서는 그 이름의 짜임이 보이게 띄어 적으면 된다. 나이마노바 울잔, 호 바오 투이린처럼 말이다. 성이 없는 이름은 억지로 성과 이름으로 나누지 않고, 가운데 요소가 있는 이름은 어느 한쪽에 밀어 넣지 않는 방식이다.
이름을 정확히 적고 알맞게 띄어 쓰는 일은 서류를 깔끔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자기 이름의 문법을 잃지 않고 사회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다.
다음 학기 출석부에도 처음 보는 유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첫 주에 물어볼 생각이다. "이름이 어떤 뜻이에요? 어떻게 불러 드리면 될까요?"라고.

▲여권과 출석부에 적힌 같은 이름 여권에는 성과 이름을 띄어 적지만, 행정문서와 출석부에는 붙여 적는다. 그 사이에서 이름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름은 가명이다.
오마이뉴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언어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사회와 일상에서 오가는 말들이 어떤 의미를 만들고 어떤 힘을 가지는지 늘 궁금한 사람입니다.
공유하기
출석부에 적힌 일곱글자 이름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